두레방은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조직하고 격려하고 임파워링하는 일을 활동의 가장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뉴스레터를 발간하기로 했을 때 이 공간이 두레방의 활동가들에게도 또 우리 언니들에게도 살아가며 투쟁하는 얘기를 쓸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마침 두레방 활동에 열심인 M으로부터 흔쾌한 승낙을 받았고 그렇게 해서 M의 한국살이 연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이 다 그렇듯이 M의 한국살이도 희노애락의 연속입니다. 희망과 꿈을 놓지 않고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M, 두레방이 많이 응원합니다!
I can still remember my first day in South Korea. I arrived smack in the middle of winter. Being used to the sunny weather of the Philippines, winter came as a shock to me.
The first month was especially difficult. No amount of thinking that you’re ready for the job you signed up for can adequately prepare you for the hardship. Night after night, you have to deal with people you feel you have nothing in common with. The worst part is that most of these people don’t see you as a person. They see you as a sexual object they could do away with as they please. You feel yourself dehumanized and violated, and there’s nothing you can do but grin and bear it.
A place seems much colder when you have no friends around. Living with fellow Filipinas made it a lot easier. They’ve been here longer than me so they knew of the hardships of being the newest in the bunch. We have no choice but to help each other out because we all know what it feels like to be away from home, away from family. Here, they are the only family you could have.
When my co-workers told me about My Sister’s Place, I got interested. I don’t go out much and I’m a bit anti-social, a trait that makes my job a bit harder for me. I’ve always loved learning, so when I heard that they hold classes for Korean language, I decided to attend. The first few sessions became a sort of distraction or outlet for me. It didn’t take a long time for me to realize that aside from the girls I live with, people from the organization could also be my family. It’s very aptly named My Sister’s Place.
I’ve been in South Korea for three months now. I still have a year and nine months to go to complete the contract. It’s not going to be easy, that’s for sure. But knowing that there are people you can run to when you’re troubled is such a big comfort, the same way springtime is just waiting to be in full bloom after a long and lonely winter.
나는 아직도 한국에 온 첫날을 기억한다. 당시 한국은 세찬 겨울의 한복판이었는데 필리핀의 화창한 날씨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한국의 겨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첫달은 특별히 더 힘들었다.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준비가 되었다고 아무리 많이 생각했어도 그것은 실제 일의 어려움에 대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매일밤 나랑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가장 최악인 것은 이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그들이 원할 때면 없앨 수도 있는 성적 대상으로 보았다. 나는 인간성이 말살되고 능욕당한 기분이었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활짝 웃고 견디는 수밖에.
주변에 친구들이 하나도 없을 때 내가 있는 곳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필리핀 동료들과 함께 사는 것은 삶을 보다 쉽게 해주었다. 그들은 한국에 나보다 먼저 왔기 때문에 신참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집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서로를 도왔다. 서로가 여기서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내 동료들이 두레방에 대해서 말해주었을 때 나는 굉장히 관심이 갔다. 나는 밖에 별로 나다니지 않는 살짝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성향이 내가 일을 하는 데 있어 마이너스로 작용하였다. 나는 항상 배움을 즐겼기 때문에 두레방에서 한국어 교실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몇 번의 교실은 나에게 일종의 오락 혹은 배출구 정도였다. 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동료들 이외에 두레방의 활동가들 역시도 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언니들의 공간(My Sister’s Place)이라는 이름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다.
한국에 온 지 3개월이 흘렀다. 계약을 다 채우려면 아직 1년 9개월이 남아 있고 단언컨대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의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위안이 된다. 길고 외로운 겨울이 끝나면 만개한 봄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