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정 (두레방 상담실장)
소요산 성병관리소(몽키하우스)
이곳은 1970년대 초부터 진료를 했던 성병관리소로 총 이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여기에서 진료를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여성들이었다. 이 성병관리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보산동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여기에는 캠프 케이시, 호비 등의 여러 미군부대들이 주둔해 있고 그 앞으로는 클럽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휴전과 함께 동두천에 미군부대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미군들을 위한 윤락시설 및 상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직후의 한국은 너무나도 가난했기 때문에 미군들을 위한 위락시설들은 굉장히 낙후되어 있었고 위생적으로는 더욱 심각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미군들이 점점 휴가 때가 되면 오키나와로 가서 오락(?)을 즐기고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69년 ‘닉슨독트린’이 발표 되고 71년 미7사단까지 철수하게 된다. 이에 한국정부는 위기의식을 느꼈고 어떻게 해서든 미군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지촌 정화사업에 착수하였다. 수도시설 등 미군들이 불만을 토로했던 부분을 고쳐나가기 시작했고 구불구불했던 길도 미군의 편의를 위해 쭉쭉 뻗은 신식 도로로 새로 닦기 시작했다. 기지촌 정화사업의 백미는 기지촌여성들을 정기적 성병검사를 받게 하고 감염여성들은 격리를 시켰던 조치였다. 정부는 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칭하며 미군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과 성병 교육을 실시하였다.
성병관리소에 격리되는 여성들은 대부분 기지촌 여성들이었다. 물론 한국 남성들을 상대하는 ‘7리(동두천 구시장 인근 지역)’ 집결지에서 온 여성들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곳의 70%가 넘는 여성들이 기지촌에서 왔다는 것은 철저하게 정부가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성병관리소를 세우고 관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60~70대 연령의 기지촌여성들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털어놓으셨다. ‘미군으로부터 컨택(병을 여성으로부터 옮았다고 고발하는 것)을 당했어. 그래서 그 몽키하우스로 들어갔는데 성병이 있어 일주일 정도 그곳에 있었지.’ 격리된 여성들은 주로 이층에서 지냈다고 회상했고 복도 중간에 화장실이 있었다고 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밖에 있는 사람이 면회를 온다거나 클럽업주가 뇌물을 써 여성을 빠른 시일 내에 수용소에서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성병관리소는 90년대 중 후반에 문을 닫았고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소요산 입구에 현재 턱 하니 쓰러져 가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내 눈에 이 모습은 지금도 기지촌에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언니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보였다. 한때 애국자라고 칭송되었던 언니들을 아무도 찾지 않는 기지촌에 남아 고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상패동 무연고 묘지
2008년에 소요산 자재암에서 무연고묘지에 안치된 기지촌 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제를 지내려고 하는데 두레방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연락을 해왔었다. 당시 두레방은 1990년 중반 이후로 기지촌에 유입되어 이제는 한국 여성들의 자리를 대체한 외국인 여성들을 지원하는 일 및 아직 생존해 있는 한국 여성들의 의료 및 생계지원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죽어간 영혼들을 미쳐 생각할 겨를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재암의 요청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끔찍한 모습으로 숨진 윤금이 사건은 그 당시 과거 기지촌여성들의 지위를 예상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끊임없이 있었지만 안보라는 미명 하에 기록화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사건을 간단하게 조사하고 마는 만행들이 이어졌다. 그런 환경에서 여성들의 시신들은 모두 상패동 무연고 묘지로 모이게 되었다. 윤금이 씨의 시신 또한 화장된 후 상패동 무연고 묘지에 뿌려졌다.
일제시대부터 상패동 무연고 묘지는 공동묘지였다. 지금도 공동묘지라고 동두천시청에선 설명한다. 하지만 보통의 공동묘지와 다르게 이 묘지에는 많은 무연고 망자들이 누워있다. 봉분의 흔적도 찾기 힘든 그곳은 번호표지판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하지만 이마저 무성하게 덮어버린 덩굴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평범한 산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천여 명이 넘은 시신들이 안치 되어있다. 수치로는 알 수 없지만 60~70년 미군의 주둔으로 도시로 형성된 동두천에는 조용히 죽어간 기지촌여성들이 있었고 상패동무연고 묘지에 많은 망자들이 그 여성들일 것이라 예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