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여성회 안김정애
1. WPP 회의의 배경
WPP는 1997년 이후 젠더 민감성에 기반한 비폭력 평화만들기 활동을 해 오고 있는 단체로 주기적으로 활동가와 학자를 함께 초청하여 여성, 평화, 안보 이슈에 대한 지식을 함께 나누고 공동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지역별, 전지구적 협의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유엔안보리결의 1325호(이하 결의1325) 채택 15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된 이번 아시아 협의회는, 아시아에서의 젠더와 군사주의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아시아에서 어떻게 군사주의가 발생하였으며 아시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지역의 활동가와 학자들을 초청하여 군사화 반대를 위한 지식교환과 공동전략 수립을 논의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이번 회의는 2014년 7월 2일-7월 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Cape Town에서 개최되었던 회의의 후속조치로 개최되었는데, 당시 회의에서 아시아 대표들이 지역적 수준에서 논의가 심층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성사되었다.
2. 회의 내용
회의는 2015년 12월 7일부터 12월 9일까지 사흘간 필리핀 마닐라 마르코 폴로 호텔에서 열렸다.
제목과 주제는 “아시아에서의 젠더와 군사주의: 지역적인 분석을 토착적 실제화와 연계시키기”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웨스트 파푸아), 스리랑카, 인도, 피지, 필리핀(민다나오), 네팔, 대한민국, 미국 등 총 9개국에서 22명이 참석하였는데, 남성들도 4명이 참석하였다.
7일 아침 9시부터 시작. 두 명씩 짝을 지어 상대방을 소개하는 순서. 내 짝은 인도네시아 웨스트 파푸아에서 온 여성운동가 칼라(Carla)로, 그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의 인신매매와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 이주 노동자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웨스트 파푸아에 자행하고 있는 강압적인 폭력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였다.
첫 번째 세션의 주제는 식민주의 유산으로서의 군사주의와 전쟁 영웅화 문제.
대부분의 나라들이 유럽 등 강대국으로부터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었고, 이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계속 군사주의가 횡행하는 근본적인 뿌리가 되었다는 데 참가자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하였다. 인도 발표자(남성)는 인도의 역사를 통해 영국 식민지 시대에 뿌려진 군사주의의 전통이 강고함을 역설하였고, 전쟁영웅의 초상화가 많은 국민들에게 군사주의를 우상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언론도 전쟁의 양상을 자국 중심의 애국사상 고취에 이용하고 있음을 각국 방송 화면을 통해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1965년에 있었던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을 기억하는 2015년 전쟁발발 50주년 TV보도를 보면, 인도와 파키스탄 양 국이 똑같은 전투를 각자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하여 서로 승리했다고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음을 들었다. 이들 두 국가가 식민지로부터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서로 적(enemy)의 이미지를 창조해 내고 생산해 내는 데 광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쟁과 군사주의는 끊이지 않고 존속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미국 대표로 참석한 2015WCD 국제위원회 실행위원장 크리스틴 안은 한반도의 상황 역시 일본의 식민지 경험과 해방 이후 군사주의의 계속된 경험이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한반도 분단사를 설명한 후 지난 5월에 치러진 Crossing 다큐 영상(10분)을 틀었다. 그는 남북한이 일종의 ‘거울 이미지(mirror image)’로서 군사주의를 이용, 분단을 정권유지에 계속 이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여성성(feminity)을 이용하는 것이 남성성(masculinity)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평화 성취에 강력하며, DMZ 종단은 여성들에게 정치적인 선택을 하게 한 사건이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미국의 군산복합체 문제를 지적하였고, 북한 역시 군사화된 국가이며, 핵 문제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음을 지적하였다. 한반도 여성들은 분단 문제 극복/평화통일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오후 세션의 주제는 각국의 반테러 수단과 제재가 어떻게 군사화되고 여성시민사회단체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가 였다. 발제자와 참석자들은 대부분 정부가 반테러 명분으로 시민사회단체를 감시하고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별로 이야기하는 시간에 각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례를 제시하였는데, 평화여성회는 남한의 경우 대통령이 노동자 등 평화집회 시위대를 향해 IS로 지칭하고 있으며, 미국의 애국법과 유사한 국가보안법이 약 70년간 존재하고 있어서 대북민간인 접촉은 극도로 위축되어 있고, 최근 정부가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위험성이 있는 테러법을 제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점, 현 정권 하에서 여성시민사회의 활동이 축소되고 있음 등을 소개하였다. 민다나오 활동가의 경우도 계속되는 전화 도청, NGO 감시, 경제적 원조 단절 등을 경험했다고 진술하였다. 웨스트 파푸아 참가자는, 인도네시아가 주요 무기 수입국으로서 들여 온 무기를 웨스트 파푸아 독립운동 탄압에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참가자들은 한 목소리로 각국 정부에게 반테러 명분으로 지출되는 군사비를 감소시킬 것과 군사비의 정당한 사용을 주장하였는데, 예를 들면 시리아의 경우 내전발생은 가뭄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군사비는 기후변화와 천연자원의 고갈을 막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8일 오전 세션의 주제는 아시아에서의 종교적 극단주의 문제이다.
먼저 필리핀의 사례가 발표되었는데, 다양한 종교간의 대화가 강조되었고, 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필리핀은 여성들이 종교간 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종교 문제 역시 가부장 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종교에서 여성은 늘 보조자(assistant)로 등장하며, “이슬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사례가 발표되었는데, 발표자는 이 곳에는 20여 가지의 종교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며, 무슬림, 힌두교,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와의 대화가 강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간 대화 시 영성(spirituality), 인간성(humanity), 다양성(diversity), 자유(freedom) 등의 원칙이 제시되며, 시민 간, 그리고 여성들 간의 종교적 갈등은 존재하지 않으나 남성, 가부장제 하의 기득권 세력은 종교 분열과 갈등 조장을 주도하고 있음과 무슬림 여성에 대한 폭력이 공공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었다.
스리랑카의 경우 아직까지 군부 정권이 이어지고 있고, 종교간 갈등이 적지 않지만 다양한 종교를 가진 젊은이들을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소개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수 공동체의 문제, 극단주의 이슬람 문제,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문제가 있음도 지적되었다. 무엇보다도 종교간 대화가 중요하다는 점에는 참가자가 전원 일치된 의견을 보였으며, 인권(human rights)과 여권(women rights) 모두 중요하다는 의견에도 모두 동의하였다.
한 참가자는 종교의 문제는 결국 해석의 문제이며, 현재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misunderstanding)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종교는 좀 더 인간화(humanized)되어야 하는 것, 결국 문제는 이슬람을 비롯한 기성 종교들이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해석되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하여 동의를 이끌어 냈다. 남성의 맥락으로 종교가 해석되는 것은 여성에게 결코 유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도 참가자의 발언, “인도에서 종교는 남성들에게는 법이지만 여성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종교에서의 남녀차별, 종교의 가부장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참가자들은 종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의 창조적인 개입이 필요한데, 첫째 종교간 대화 시도하기, 둘째 각 종교의 문맥 이해하기, 셋째 청년캠프 운영하기, 넷째 여성의 언어로 문서 작성하기 등을 제시하였다.
오후 세션은 전쟁을 촉진하는 무기 경쟁을 주제로 하였는데 군수산업, 군비 증가 등이 사회 안정성을 저해함으로써 여성의 복지, 교육, 보건 등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모두 동의하였다.
피지의 경우, 영국 식민지를 겪었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이후에 군사화의 길을 걸었다. 2차세계대전 때 공산당의 정글에서의 게릴라 항쟁이 훌륭했다. 피지는 현재 5천 명의 군대를 유엔평화유지군에 파견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피지의 군사주의는 새로운 지위를 얻고 있다. 1980-1990년 내전발생 시 유엔의 ODA 군축회의에 여성이 동원되었으며, 여성의 의회진출 등이 활발해졌다. 여성이 문서작성, 권고안 마련, 보고서 작성 등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여성은 모든 평화운동의 근거로 인권을 두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물적 토대는 토지이며 여성은 천연자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위기상황 발생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이러한 관계는 지속가능한 발전, 정의로운 발전, 평등, 평화와 불가분의 것이며, 전 세계 여성들의 구조적인 동맹/연대가 필수적이다.
다음으로는 여성이 비무장/군축을 주도하여 성공한 각국의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평화여성회를 비롯한 비폭력평화단체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1990년대 초에 있었던 남북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들의 대화와 이후 전개된 평화여성회의 발족, 군축과 비무장, 평화협정체결 주장, 미국과의 동등한 동맹 요구와 불평등한 SOFA 개정 등의 여성계 요구가 있었음을 조별 모임에서 발표하였다. 남한의 경우 2015년 현재 10위의 군사비 지출국이며, 39조 9847억이 국방비로 지출되어 GDP 대비 2.6%를 기록하고 있다(SIPRI 통계).
마지막 날인 12월 9일에 열린 퍼블릭 이벤트에서는 현재 평화 과정(Peace Process) 필리핀 대통령 자문이 참석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의 평화만들기 과정과 내용을 소개하였고, 그동안 각국 대표들이 주제별로 논의하였던 세션의 건의안이 요약 발표되었다.
3. 나오며
이번 회의에서 공통점으로 느낀 것은 거의 모든 나라가 유럽 등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군사주의는 식민지배의 뿌리로부터 나왔다는 것, 전쟁 영웅은 남성이며 현재도 전쟁 영웅화를 통해 전 사회가 군사화되고 있는 현실, 여성은 여전히 피해자로만 남아 있는 것, 남성이 주도하는 전쟁과 갈등, 남성이 주종인 협상 테이블, 여성이 주관자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차이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해방이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고 현재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는 것, 국가보안법에 의해 같은 민족끼리의 왕래와 이산가족 만남도 일상화되지 못하고 처벌된다는 점, 민다나오나 웨스트 파푸아의 경우 각각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내에서 갈등은 겪지만 공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는 점, 몇 십 분이면 닿을 거리도 정부의 허락 없이는 오갈 수 없는 현실, 마치 외국 여행객처럼 입출국 절차를 밟아야 하는 한반도의 현실… 참석자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고…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
참가국이 주로 서남아시아인 관계로 동북아와는 다른 군사적/ 지정학적 차이가 있다고 느껴졌다. 즉 동북아의 경우 미국의 대중국 견제 군사정책으로 인해 미군의 존재와 미군 무기들이 큰 문제인 반면, 서남아시아는 필리핀을 제외하면 큰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 군사주의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하나 큰 문제의식이 없는 듯했다. 물론 미군수산업의 문제점이 부각되기는 했으나 현재 한반도가 겪고 있는 MD, THAAD 등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전쟁과 분쟁과 갈등과 난민과 분단이 판치는 아시아. 우리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당위는 있으나 문제는 어떻게? 이다. UNSCR 1325의 경우, 여성의 안보와 평야 분야에서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긴 하나 각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없는 한, 강제력과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공허한 문서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 국가행동계획이 수립되긴 했으나 여성시민사회단체의 거버넌스 요구를 묵살하고, 모니터링 수단이 부재한 상태에서 형식적인 대외 면피용에 그치고 있다.
여성들이 힘을 모아 함께 외쳐야 한다. “여성을 협상 테이블로-”
“만일 세계가 여성들이 순수하게 오로지 인류의 유익과 선을 위해서 함께 힘을 합하는 시대를 보게 된다면, 그 힘은 세계가 결코 경험한 적이 없었던 힘이 될 것이다”(매튜 아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