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실 (두레방 자원활동가)
두레방에서는 작년 3월부터 매월 2차례씩 언니들을 위한 공예교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초, 비누, 방향제 등 만드는 재미도 있으면서 실생활에도 쓰일 수 있는 물건들을 만드는 것으로 두레방에 소속감도 높이고 일을 하지 않거나 하실 수 없는 언니들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기지촌에서 활동하시며 언니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만들어 오신 정강실 선생님이 없이는 절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996년. 버스는 불암산 아래 이어진 길을 꾸불꾸불 지나간다. 이어폰을 끼고 유열의 음악앨범을 들으며 이 길을 지나간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마을은 새로운 빛으로 치장한다. 하얀 배꽃으로 온통 뒤덮일무렵 처음 이 길을 지나갔나보다. 어린청춘에 이 길은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오래된 터널 같이 느껴졌다.
“이번 정류장은 비행장입니다” 안내방송이 나온다. 때때로 ‘뺏뻘’이라고 방송이 나오기도 한다. 커다란 수락산자락 한켠 아래 조그만 마을. 바로 옆엔 커다란 미군부대가 있다. 마을에는 놀이터 하나, 작은 미용실 하나, 중국집 하나, 비디오가게가 하나 있다. 마을 초입 성병검진소를 지나면 클럽들이 줄이어 들어서있고 더 지나 언덕을 오르면 다닥다닥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생각해보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언니들과는 많이 만났지만 마을사람들은 그닥 마주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많은 집들엔 누가 살고있었을까?? 그렇게 언덕을 거의 올라갔다싶으면 군부대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이 나왔다. 영어로 된 가게들, 부대앞을 지키는 미군들. 가끔은 여기가 한국일까 싶기도 했다.
처음 내가 그곳에 갔던 이유는 소외된 지역아동들을 위한 공부방선생님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는 세상들은 단칸방에서 엄마의 모든 삶을 보아야했던 기지촌아이들, 저녁에 번쩍거리는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 그리고 자신조차 버거운 삶에 허덕이면서 아이들을 감당해야했던 그녀들의 삶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아이들에게 공부보다 먼저 채워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알게 된 언니들. 때로는 우악스러운, 이모같이 따뜻한 언니들이었다. 모성애에 굶주렸던 나에게 ‘관계’라는 행복을 알게해준 그녀들. 가족들을 부양하고도 버림받아 강아지와 둘이 살아가는 회장님, 밥을 먹는것조차 눈치보며 살아야했던 삶에 길들여져 두레방식구들 밥을 다 차려주고 부엌구석에서 쪼그려 식사하던 아줌마, 새엄마가 팔아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가며 팔려가던 12살에서 멈춰버린 은경이.. 아픔을 묻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가로막은 거대한 벽. 미군에 의한 언니들의 죽음, 이에 대처하는 경찰과 국가의 태도. 어린시절 무수히 가슴에 손을 얹고 ‘충성?’을 다짐했던 내 나라의 모습. 기.지.촌.의 뒷면에 숨겨진 무서운 거대조직들…분노와 좌절의 감정들.
기지촌활동을 하며 살면서 항상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도 꽤 흘렀다. 이 후미진 작은 마을도 변했다. 기지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도 조금은 바뀌고, 언니들의 의식과 삶도 조금은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들은 너무 많다.
2015년, 두레방에서 쌤들과 함께 언니들을 위한 색다른 공예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매번 참석해주는 똑똑한 순영언니도, 예쁜 희영언니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약간은 조급한 맘이 든다.
이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고싶다. 2016년에도 언니들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만들며 같이 찾아보려 한다. 그렇게 고마움과 사랑을 갚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