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운 (두레방 자원활동가)
지난 7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466호에서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제9차 변론이 열렸다. 이날 변론에서는 지난 8차 변론과 마찬가지로 증인으로서 위안부 당사자인 원고들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나는 자원활동가로 작년차 변론 자료에 쓰인 70년대 당시 기지촌 운영 계획 등을 기록한 한미합동위원회의 회의록 등을 번역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열악하고 강제적인 기지촌의 상황을 문서로만 접했기에 당사자 진술을 생생하게 듣고자 했다. 오늘의 증인은 1971년부터 1995년까지 연천, 동두천, 의정부 지역에서 기지촌 위안부 생활을 한 원고 박영자씨였다.
1971년, 영자씨는 큰언니를 따라 영등포의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몇개월간 다방의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다가 작은언니의 집에서 묵게 되어 일을 관두고 같은 직업소개소를 홀로 다시 찾았다. 직업소개소는 ‘일어서봐라’, ‘앉아봐라’를 여러번 시켰다. 그런 뒤 그녀를 연천의 기지촌에 데려다 놓았다. 당시 15세의 영자씨였다.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해야하게 되면서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어느새 그녀의 이름 아래 소개비라는 명목의 빚이 생겨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자씨는 당시 한 군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 군인이 주인에게 도움을 구한 사실을 얘기하여 주인은 영자씨를 차를 태워 동두천으로 보냈다. 방 하나당 한 명의 아가씨가 있었고 외워야 하는 영어를 적어주고 외우라고 감시했다고 영자씨는 동두천 기지촌을 묘사했다. 연천에서 동두천으로, 동두천에서 의정부로, 기지촌 간 이동과정에서 영자씨가 돈을 받거나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개비가 올라가 빚이 늘어났다. 영자씨는 의정부에서의 그녀의 빚을 $200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어디까지나 영자씨는 미성년자였다. 직업소개소에게도 포주에게도 나이를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된 적은 없었다. 동두천의 포주는 영자씨를 데리고 가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었고, 보건소에 의한 성병검사와 경찰을 대면할 때 그 가짜 신분증을 확인한 것 이외에 나이를 물어본 일이 없었다. 영자씨는 또래 미성년자 위안부의 수가 많았고 그 비율도 굉장히 컸던 것으로 기억했다.
빚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영자씨는 그녀가 일정금액 이상 벌어야 그것을 본인에게 일부 분배해주고 실제 수익이 목표금액에 못 미치는 경우 돈을 받지 못하고 그로부터 방세와 식비만 자동 충당되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빚이 조금 줄었을 것으로 여겨질 때에는 포주가 방에 가구를 사주면서 다시 빚을 늘리기도 했다고 했다. 생활비의 많은 비중이 약을 사는 데 쓰였다. 아침에 10알, 점심에 8알, 6알 등 과량의 진통제를 먹어야 ‘영업’할 용기가 났고 영자씨의 기억에 의하면 7-80%의 다른 위안부들도 같은 약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영자씨와 많은 동료들은 해당 진통제뿐만 아니라 많은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7-80년대 주2회, 80년 후반 기준 주1회 이루어지던 성병검진은 시와 미군당국, 보건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정확한 성병검진은 기지촌 내의 의료원 옆의 보건소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검진을 통과해야만 검진증이 주어졌는데 검진증을 소지하지 않고 영업하는 것을 단속하기 위해 토벌을 나왔다. ‘토벌’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검진증을 소지하지 않고 영업을 하다 적발되는 것은 위안부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와 보건소, 군 당국으로 이루어진 토벌단은 검진증이 없으면 버스에 태워 낙검자수용소로 데려갔다. 또한 자매회의 회장언니와 미군이 함께 나와 미군이 자신에게 성병을 옮긴 위안부를 지정하는 ‘컨택’을 하면 검진여부나 진위와 관계없이 해당 위안부를 우선 낙검자수용소로 보냈다. 이처럼 검진증이 없거나 컨택을 받아서 낙검자수용소에 가게 된 경우, 성병검사에서 낙검하면 가두어놓고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며 최소 3일에서 최대 일주일가량을 가두어진 상태로 보내야 했다. 영희씨는 자신의 수용경험을 묘사하며 페니실린을 맞으면 통증이 엄청나고, 그것을 맞는 것 이외에는 낙검자수용소에서 하는 게 없었다고 밝혔다. 낙검자수용소로부터 도망가거나 개인적으로 치료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영자씨는 성병검진이 위안부 당사자를 위한 것보다 미군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고 진술했다.
영자씨는 1995년에 미군의 도움으로 빚을 갚게 된 것을 계기로 기지촌을 나오게 되었다. 왜 95년 이전에는 나올 생각을 못했느냐는 질문에 도망을 가려하면 폭행하고, 다른 기지촌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을 겪으면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고, 또한 무엇보다도 기지촌에 들어갈 당시 15세였던 그녀가 나와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아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감시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디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오지 못했다고 담담히 밝혔다.
기지촌을 나온 이후 영자씨는 식당일을 하다가 여러 가지 후유증을 겪으며 일을 하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현재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생활하고 있으며 당시 먹던 진통제에 여전히 일부 의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지촌 이후에도 쉽지 않은 생활 속에서 지금 이렇게 소를 제기하고 증언까지 하게 된 연유를 묻는 마지막 질문에 원고는 품에서 미리 적어온 편지를 꺼냈다. 10대의 나이에 위안부로 생활하게 되면서 몸이 병들었고 돈을 벌지 못한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단어 하나 하나에 세월을 담아 호소하는 원고의 이야기에 나는 이제까지 열심히 적어 내리던 메모를 더 하지 못했고 자리를 채운 다른 많은 원고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9월 2일과 10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비공개의 당사자 진술이 예정되어 있다. 10차와 11차 변론에서 원고들의 당사자들의 진술에 이어 국가적 차원에서 기지촌을 조성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실정적으로 금지된 성매매를 권유하고 관리한 책임을 묻는 법률적 근거를 밝히는 변론이 준비되어 있다.
<영자 언니는 소송을 제기하고 힘든 공개 진술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변호사의 질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아래와 같이 준비해온 글을 읽었습니다.>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우린 태어난 이 나라에서 버려졌습니다. 우리나라가 개입하여 만든 기지촌 거기서 우리는 폭력과 갈취 이용만 당했습니다. 아무도 우리 입장을 생각해 주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기지촌으로 들어가게 만든 직업소개소와 포주들 다 묵인해주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번 돈은 상상이상 일것입니다. 몸을 버렸으면 돈이라도 벌었어야죠. 돈 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포주만 돈을 버는 이런 구조를 만든 우리나라가 우리를 이용해 먹고 버린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원해서 그곳에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직업소개소에 속아 기지촌으로 빚을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빚은 돈을 벌수록 이상하게 더 오르게 되고 십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도와주는 어른도 없었습니다. 하루에 상대하는 미군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5명 이상입니다. 이런 것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도망가면 찾아 잡아오고 때리고,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면 포주한테 일러서 빚을 올려 다른 곳을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판사님 이런 상황에서 제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억울합니다.
옛날에 박정희 경제개발 했다고 그러지만 우리가 애국자 소리 들으면서 달러 엄청 많이 벌어들인 거예요 그때는 아파트 해준 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일본 위안부 있는데 국가에서 관리해준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성년자라고 집에 보내는 것도 없고 나라에서 다 버린거잖아요 그럼 책임 져야죠.
군산타운 백태하 라는 사람은 달러를 많이 벌었다고 상 3번 탔다면서요 그 달러 누가 다 벌어드렸는데요? 아가씨들이 다 벌어드린 건데 아파 죽어가도 의사 하나 안 내려다보고 오로지 성병검진만 했습니다. 성병검진은 미군을 위해서 미군 요청의해서 해준거지 우리를 위해서 해준거 아니잖아요.
나라의 무관심에 우리의 몸은 병들고 돈도 못 벌고 이용만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책임 져야죠.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