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목사 (뿌리의집 원장)
20년 전 이맘때였다. 스위스 베른의 늦가을, 서울보다 조금 일찍 어둠이 내렸다. 베른 부근에 사는 입양인들이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하고 모이는 날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미리 예약해둔 자리로 갔다. 먼저 온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이였다. 검은 머리에 연푸른 눈, 창백한 살결을 지닌 여성이었다. 백인과 동양인이 다 깃든 얼굴.
캐서린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경기도 송탄에서 태어났고, 아빠는 미군이었다. 함께 살던 미군 병사가 귀국하고 두어 해 지난 후 엄마는 죽었다. 나중에 한국의 가족을 찾은 후 안 일이지만, 그 때 엄마는 스물 두 살이었다. 캐서린은 송탄 부근에 사시는 할머니 품에서 8살까지 살았다. 동네 아이들이 읍내 학교로 간 시간에 캐서린은 대청마루기둥에 고무줄을 매고 혼자 하루 종일 놀아야 했다. 할머니는 혼혈손녀를 차마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동네에서의 수치도 버거운데 읍내까지 소문나게 할 수는 없었다. 손녀를 학교에 조차 보낼 수 없었던 할머니는 결국 모진 결심을 했다. 할머니와 손녀는 날카로운 외침 사이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입양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캐서린이 도착한 땅은 스위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스위스였지만, 스위스는 캐서린에게 유독 가혹한 땅이었다. 베른 부근에 있는 한 작은 도시의 의사부부 가정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캐서린을 기다린 것은 유복함이 아니라 입양모의 시기와 질투였다. 사실 캐서린은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눈부신 아름다움이란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을까. 아무튼 이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아빠를 윽박질러 캐서린을 스위스 동부의 산간 지방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내버렸다. 16살, 학교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캐서린이 알게 된 것은 입양부모가 그녀의 입양을 위한 법적 절차를 개시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입양부모는 문전에서 돌려보냈고, 캐서린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스위스의 시민권이 없는 ‘망명신청자(asylum seeker)’의 신분.
스위스 정부는 캐서린을 한 시골 마을로 보내고 거주제한을 명했다. 반경 1Km가 못 되는 작은 마을에 갇혔고, 양로원 노인들의 옷가지를 빠는 빨래소녀가 되었다. 두 어 해가 지난 후 양로원에 물품을 운반하러 드나들던 한 스위스 청년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출생증명서가 없었던 캐서린이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출생증명서 비슷한 공공문서를 얻는데 2년이 걸렸고, 둘은 결혼을 했다. 얼마 후 캐서린은 스위스 시민이 되었다. 거주 제한이 풀리고, 남편과 함께 살림을 차렸다. 사내아이들 넷을 줄줄이 낳았다. 서른 살 무렵, 그 날 저녁 그녀는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물음 덩어리인 온몸으로 거기, 한국계 입양인들이 만나는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서툴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의 슬픔과 눈물은 같이 앉은 이들을 황망과 처절로 내몰았다. 그러나 그게 그녀에게는 삶의 새 챕터(chapter)의 시작.
나는 그녀의 한국 가족을 수소문했다. 그녀의 외삼촌 둘과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셨다. 외삼촌 둘은 캐서린의 엄마가 몸으로 벌어내었기에 비극이 묻은 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동네에서 나름 장사가 잘 되는 가게를 각각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성공을 했다. 23년 만에 모국을 방문한 캐서린과 할머니는 부둥켜안고 몸부림을 쳤다. 눈물과 기쁨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품에서 캐서린은 거듭났다고 해야 할까. 자신을 감싸고 있는 할머니의 두 팔의 힘이, 그녀 깊고 깊은 내면에 응고된 강제이별과 버림받음의 냉혹한 얼음을 녹여버렸다. 두 삼촌의 뜨거운 눈물 안에서, 그리고 그 눈물 젖은 눈빛 안에서 흘러나오는 죄책의 고백과 용서의 요청 안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일으켜 세웠다. 신기하게도 부정의 존재감과 수동성이라는 심연의 깊은 어디로부턴가 긍정의 존재감과 자기주도성의 의지가 밀고 올라왔다.
캐서린은 스위스에 돌아와서 얼마를 지내는 동안, 시민권이 없었던 자기를 결혼이라는 방식으로 구원해줬다는 것을 빌미삼아 경멸을 일삼고 끊임없이 복속만을 강요해왔던 남편과 결별하기로 결심했다. 아들 넷을 데리고 나와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저항하고 선택하는 힘을 길렀다. 억압과 두려움 가운데서 피동적인 방식으로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결별했다. 자기 삶을 자기의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구성해가기 시작했다. 한국계 입양인을 만나 재혼을 했다. 나는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서줬고 많은 입양인 친구들이 와서 축하해줬다. 캐서린은 새 남편에게서 딸 하나를 얻었다. 딸은 영락 한국 아이다. 엄마 아빠가 다 한국에서 왔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들은 하나씩 독립해서 나갔고, 십대 소녀인 딸은 아직 집에서 함께 산다. 캐서린은 이제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한 남편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지닌 존경받는 중년의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있다.
이야기가 길었다. 두레방의 원고부탁을 받고 망설이다가 꺼내 놓는 소중한 한 여인의 이야기다. 실은 셋 아니 네 여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캐서린의 할머니, 캐서린의 엄마, 그리고 캐서린과 캐서린의 딸. 이 세대를 이어가는 여성들의 삶에 어린 질곡들의 파노라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의 세계지배와 제국주의, 무력을 통해서만 평화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일상이 폭력에 다름 아닌 미군의 주둔과 군사주의, 가장 어리고 무력하며 가난한 여성의 몸을 기지촌에 배치하는 한국이란 나라의 제도 안에 깃든 가부장제, 여성과 아동의 몸을 팔아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의 종자돈을 마련한 냉혈자본주의와 경제제일주의, 누나가 몸 팔아 벌어준 돈으로 학업과 성공의 길을 달려온 이 땅의 남성들만을 위한 남성우월주의, 서구의 자비와 백인 모성의 우월성이라는 허위의식을 기반으로 그 정당성을 재생산해온 서구우월주의….이 모든 힘들의 부력을 받아 비행기는 날았다. 아이를 실은 비행기는 날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직도 날고 있다.
20만이 넘는 해외입양인들. 이들은 친생모와 친가족과의 완전 결별을 겪었다. 첫 이름과 친구들과 사회와 언어와 문화와 모국의 땅을 상실했다. 우리나라가 1993년에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은 친생부모와 분리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이들에게 이 권리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이제 성장한 입양인들은 친생부모와 재회하고 재결합할 권리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
마침 미국으로 입양 보내어진 한국계 혼혈입양인들이 나섰다. 2년 전 이들이 ‘한국혼혈입양인협회(KAMRA/Korean Adoptee Mixed Race Association)’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유전자검사(DNA Test)를 통해서 친가족찾기를 하겠다고 나선 단체이다.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혼혈입양인 한 분이 이를 위해서 100만 달러(한화로 11억 5천만원 정도)를 쾌척했다. 유전자검사 키트 1만개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지난 봄에는 ‘한국혼혈인입양인협회’의 임원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유전자 검사를 통한 가족찾기 캠페인을 벌였다. 의정부의 두레방도 방문하고 파주도 다녀왔다. 그러나 혼혈입양인들의 어머니들이 연로하시기도 하고 선뜻 나서주시지도 않으셨다. 기지촌에서 사시면서 자녀를 낳아 미국으로 혹은 다른 나라로 입양을 보낸 분들이 있으시겠지만, 개인적인 생활고를 겪으시는 중에 나서서 아이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 일에 대해서 주저하시는 분들도 있으신 것 같다. 그런 중에도 몇몇 분들이 검사를 받으셨다. 미국의 아버지를 찾은 입양인들도 여럿 있고, 한국에서도 두 가족이 입양 보낸 자식을 찾기도 했다. 비록 그 숫자는 미미하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신 한국의 모든 부모님들과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전자 검사를 한 모든 입양인들을 일일이 대조해서 찾는 방식이기 때문에 나름 찾을 가능성이 더 높은 방식이다. 입양 보낸 원가족들의 검사가 더 많아져야 좋은 결과도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유전자 검사를 뒷바라지 하면서, 나는 캐서린을 늘 생각한다. 캐서린은 할머니와의 만남 안에서 용기 있는 새사람이 되었다. 그 전에는 자기를 부정하고 무력한 삶을 살았지만, 할머니의 품에 안긴 순간 캐서린은 긍정적 존재감과 삶에 대한 자기주도성을 기적적으로 되찾았다. 그리고 그 후의 그녀의 삶은 달라졌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기 부정은 사라지고 활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나날의 삶을 화려하게 가꾸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
혹시 입양 보낸 아이에 대한 부끄러움 가운데 계신 할머니들이 계실까 해서 캐서린의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나는 할머니들의 잘못은 없다고 믿는다. 나라가 잘못한 것이다. 여성과 아이를 제물로 삼아 나라의 안보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게 우리나라다. 나라는 할머니들과 입양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자식을 찾아 나서는 일을 그 누구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그런 일을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캐서린이 슬픔과 우울과 좌절과 죽음의 심연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할머니들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가족재회란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되찾는 근원적 인권회복 혹은 인간회복의 한 길이 아닐까.
(사)뿌리의집은 우리나라의 해외입양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비영리 시민단체(NGO)이다.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와 입양전문 출판사와 자그마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혼혈입양인협회’의 부탁을 받고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유전자 검사를 하고 있다.(뿌리의집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25-10/ 전화: 02 3210 2451/ 누리집: www.koroo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