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운 (다큐멘터리 ‘호스트네이션’ 감독)
지난 9월 12일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에서 햇살사회복지회 주최로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주크박스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연출: 이양구, 음악감독: 유성숙)의 작년 평택 초연을 놓쳐서 아쉬웠던 나는 이번 공연을 무척 기대하며 뮤지컬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첫 무대는 김숙자 할머니가 무대 중앙에 홀로 앉아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담담한 회상으로 나는 조용히 기지촌의 과거로 들어가게 되었다. 김숙자 할머니는 자신이 사랑했던 쿠바계 미군 병사- 영어 이름이 어려워 ‘영철’이라고 부르던 연하의 미군과 사랑의 순간들을 아련하게 추억한다. 그리고 짧은 동거 끝에 미국으로 돌아간’영철’과의 슬픈 이별은 숙자 할머니가 패티김의 ‘이별’을 부르며 마무리된다. 나는 이쯤에서 미군과의 사랑 이야기로 뮤지컬의 첫 장을 시작한 것이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무대는 사랑하는 미군을 따라서 미국에 도착한 OO할머니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착한 미국 버지니아 산골 마을은 화장실도 욕실도 없는 집이었다. OO할머니는 자신의 기억 속의 미국인 시어머니를 연기하며 아들이 데려온 젊은 한국인 며느리를 맞이한다.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한국 며느리에게 OO할머니가 연기하는 미국인 시어머니는 연신 ‘허니, 잇츠 오케이’라고 말한다. 시어머니 옆에 있는 미군의 형은 ‘맘 아임 헝그리’를 추임새 넣듯 반복하며 관객의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배우는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라는 대사를 연속한다. 미군 남편과 한국인 새신부는 ‘유 아 마이 선샤인’을 부르며 사랑의 맹세를 나눠보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 모두는 한 칸의 방에서 한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한다. 이 매력적인 구조의 두 번째 장은 나를 단번에 할머니가 살던 시대의 기지촌으로 데려가 그 시절의 젊은이들을 상상하게 했다. 유행하던 팝송, 미국의 시대상, 한국의 가난, 아메리칸 드림 그리고 젊고 아름다웠을 그 공간의 사람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뮤지컬 두 장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기지촌에서 살아남은 수많은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기지촌에서 그 시절을 살았던 여성들도 보통의 한국 사람과 다르지 않은 보통의 꿈을 꾸며 살았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 사랑하고, 행복해지고 싶었던 가난한 여자아이들의 꿈과 허영심이 어떻게 이용되고 배신당했을 지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에 도착한 새신부가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 라고 되뇌는 모습이 절절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첫 장의 불편했던 사랑의 대상인 쿠바계 미군 병사 ‘영철’과 버지니아 산골 출신의 미군 병사를 생각해 보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유색인 청년들이 교육을 담보로 동원되고, 그들의 젊은 모험심과 의협심이 이렇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2장의 시어머니 옆에 있던 미군 형의 대사‘맘 아임 헝그리’가 웃기면서 슬픈 이유이다. 이쯤에서 ‘그대 있는 곳까지’는 미군 주둔국인 한국의 현대를 상징하는 우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기지촌은 한국 사회의 우화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가난한 한국 여자아이들 꿈과 허영심을 거래하고, 막막한 미국 남자아이들의 꿈을 팔아 안보를 보장받고 정권을 유지했던 이들은 어디 있을까? 기지촌 공간에서 돈을 벌었던 이들은 이제 모두 어디 가고 아직도 힘없고 늙은 사람들만 남아 기지촌의 우화가 되어야 할까 묻고 싶어졌다.
뮤지컬로 펼쳐지는 이 우화는 차츰 책임의 문제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다시 현재 시점의 숙자 할머니는 홀로 사는 방에서 잠이 든다. 혼혈인 아들을 입양 보내고 술로 세월을 보내던 숙자 할머니는 꿈속에서 아들을 만난다. 잠시 밥을 나눠 먹던 아들이 떠나려 하자 할머니는 꿈이라도 자고 가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다음 장, 기지촌 클럽 업주가 잠깐 놀러 온 여자아이에게 옷과 화장품을 안기며 빚을 지운다. 이 빚을 빌미로 여자 아이에게 클럽 일을 시키고 환각제를 먹인다. 또 하나의 ‘또라이’가 탄생했다고 자조하는 여자아이의 동료들은 곧바로 보건증 검사하러 나온 공무원과 경찰을 맞이한다. 보건소 직원은 주 2회의 성병 검사를 받고 보건증에 도장 받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윽박지른다. 그러면 클럽의 매니저는 조용히 이들에게 돈을 쥐어줘서 보낸다. 클럽 업주, 매니저, 화장품 장수, 옷 장수 그리고 공무원, 경찰까지 모든 조력자가 기지촌 여성들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한국 산업화 시기의 제약회사들은 피로회복제로 둔갑한 각성제를 팔았고, 기지촌에서 이렇게 환각제를 팔아 오늘날의 거대 제약회사의 기반을 마련했다. 뮤지컬은 조금씩 혼혈인, 입양, 그리고 조력자와 동원된 공권력의 문제를 환기한다.
뮤지컬 마지막 장은 다시 김숙자 할머니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숙자 할머니의 소원은 ‘영철’을 만나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헤어진 ‘영철’이 숙자 할머니에게 보냈다는 녹음테이프 속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녹음테이프 속 미국인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낡은 웅얼거림이 되었지만, 행복했던 과거의 한 조각을 붙잡고 사는 숙자 할머니의 그리움을 경험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전에 두레방 언니들과 얘기할 때마다 언니들이 고생했던 얘기를 하는 중에도 절대 미군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을 보며 느꼈던 혼란스러운 감정에 답을 찾은 듯했다. 젊은 날의 한 시절을 함께한 미군들이 이분들에게 어떤 존재였을지 아득하지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출연진 전원이 신나고 씩씩하게 노래 한 자락씩 뽐내고 관객과 즐기는 축제가 펼쳐졌다. 그렇게 긴 우화의 끝이 났다.
주크박스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숨겨진 공간인 기지촌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던 지워진 여성들을 다시 우리 사회에 불러내는 과정에 있는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지워버리려고 했던 이름과 얼굴이 과거에서 걸어 나와 노래가 되고 연극이 되어 호명되고 우화가 되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있다.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떻게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군사주의와 안보의 이름으로 이용했는지 더 많이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