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8일에 진행한 심포지엄 <한국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역사와 소송의 의미>에서 소송 원고 박영자 언니가 발표를 하였습니다.
두레방 박영자, 소송 원고
의정부 뺏뻘에는 30년동안 두레방이 한결같이 옆에 있어주었다. 어느날은 밥을 먹고 어느날은 떡을먹으며 두레방에 둘러앉아 두레방 식구들과 동네 언니들과 함께 있었다. 그 시간은 결코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는 가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두레방 식구들와 함께 한지 10년이 넘어서야 내가 기지촌에 있었던 것이 정부로 부터의 폭력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옛날 일을 하나하나 다시 짚어보니 더욱 화가 치밀러 올랐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두레방에 오는 여자들도 모두가 국가로 받은 폭력을 알고 나서 욕까지 저절로 나왔으니 말이다.
우린 자연스럽게 우리가 받은 피해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송하기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원장님으로부터 국가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의 피해를 드러내자고 했을 땐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감히 정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겠다고 생각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레방 식구들이 도와준다고 하고 나는 소송에서 나의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과정부터 시작하였다. 그 시절 정부는 기지촌에서 나를 이용하면서 달러를 벌면서 애국자라 칭하고 많이 벌어준다 고맙다 하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여자이었다. 기지촌에서 나올라고 해도 나올 수 없게 만든 국가로 부터 나는 나의 손가락질 받은 여자가 아니 평범한 여자 임으로 나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소송의 진행은 길게 느껴졌다. 두레방 식구들과 법원을 갈 때마다 아픈 허리때문에 고생을 하였다. 준비한 방석을 깔고 나서야 재판에 집중 할 수 있었고 증인으로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그것은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평택에서, 동두천에서 온 여자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재판장 안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증인 할 수 있게냐는 제안에 쉽게 손을 들었을 것이다. 증언준비를 하는 동안 옛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북받쳐 올라왔다. 바보 같이 그 안에서 답답하게 당하고 살았을까? 왜 국가에게 이용을 당했을까? 후회스러운 마음에 증언 준비를 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남 앞에서 말을 한다는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일주일을 꼬박 증언하는 연습을 하고 자신감이 생겨 잘 말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재판 당일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연습하는 기간내내 북받쳤던 느낌이 사라져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하고 싶은 발언을 준비한 종이를 읽으며 다시 감정이 잡을 수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마무리 하였다.
재판 항소심을 한다고 다시 허락을 구하는 연락을 두레방에서 받았고 당연 진행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첫 번째 재판과 다르게 이번 재판에서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중에 변호사님과 두레방 식구들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아닌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항소심 마지막 최후의 진술에서 할 수 있겠냐는 문의가 왔을 때 바로 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잘 읽을 수 있도록 일주일동안 단어와 문장을 고치며 준비하였다. 우리쪽 변호사가 화면으로 자료를 준비하여 자세한 설명이 끝나고 반대편 변호사가 이야기하는데 너무나 화가 났다. 그 젊은 여자 변호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공무원들이 잘못이 없다고 말을 할 수 있는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화가 났다. 그리고 최후의 진술을 하는데 너무나 억울해서 죽을 거 같았다. 연습한대로 읽어 내려가는데 그 억울함 때문인지 첫 문장부터 눈물이 났고 결코 멈출수가 없었다. 손이 떨렸다. 그들이 무엇을 알까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도 나는 준비한 발언을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판사가 꼭 내 말을 들어주어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길 바랬다.
그리고 항고심의 결과는 너무나 기뻤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구나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비통함을 알아주는 판결을 받아서 너무나 기뻤다.
나는 재판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두레방 식구들과 삼겹살을 먹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비록 늘 재판에 오고가고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런나날을 두레방 식구들과 저녁을 하며 재판의 이야기를 하고 나의 증언에 대해 나의 최후의 진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다음의 재판에 대해 논하는 것이 좋았다.
많은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 타의에 의해서 이러한 피해를 당하고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가 원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꼭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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