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이 왔다. 긴 뿌리를 땅에 품은 채 겨울을 이겨낸 생명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이맘때면 언니들도 분주해지신다. 호주머니가 많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이른 아침부터 두레방 문을 열고 들어와 “나 마실 댕겨 올게” 한 마디 툭 던지고 까만 비닐봉지와 주머니칼을 챙겨 휘리릭 사라지신다.
땀이 많은 순이 언니는 ‘흐린 봄날’ 나물 캐러가는 것을 좋아한다. 순이 언니와 나는 아직은 누런 흙으로 덮여있는 배추밭으로 갔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밭을 갈아엎으니까 지금 가야 냉이를 캘 수 있어”
뭐가 있을까 싶은 황톳빛 배추밭을 걸어가며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 냉이들이 오밀조밀 올라와있다.
어떤 녀석들은 벌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내 언니는 아이처럼 철퍼덕 주저앉아 냉이를 캐기 시작한다.
“이런 걸 먹어야 건강해지는 거야”
언니는 자연인, 아니, 마치 ‘자연 아이’ 같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났다.
찬바람이 좀 가라앉고 햇살이 머리 위에 올라앉을 무렵, 연희 언니가 오셨다. “이거 먹을 테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쑥 내미시기에 보니, 가지런하게 잘라 온 쑥이 한줌이다. 언젠가 언니가 공장에서 일할 때 직접 만드셨다는 작은 칼로 예쁘게도 잘라오셨다. “가져가서 아줌마 드셔야지요” 하고 말씀드리니 “내껀 여기 있어” 하시며 다른 쪽 주머니를 슬쩍 보여주신다. 조끼에 달린 자그만 여섯 개의 주머니에 각각 다른 종류의 나물들이 향기롭게 모여 있다. “그럼 쑥 한 줌만 주셔요. 낼 점심에 먹을게요.”
퇴근시간이 다 되어가면서 채 가지 못한 찬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순이 언니가 저 멀리 오시며 큰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야! 내가 나물 뜯어왔어! 이거 뒀다가 내일 니들 먹어!” 까만 봉지를 툭 내미시는데 냉이가 한 가득이다. “아녀요, 아줌마 드셔야지요.” “아냐! 나 먹을 건 여기 있어.” “그럼 낼 국 한 끼 끓여먹게 한줌만 주셔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한 참을 고민했다. 무슨 국을 끓여야하나… 쑥국? 냉잇국? 분명 오늘 점심때 즈음 두레방에 와서 “내가 캐온 나물로 국 끓여 먹어봤어?” 하고 물어보실 텐데… 결국 우리는 건강한 ‘쑥냉이섞어된장국(?!)’으로 점심을 맛나게 먹고, 언니들도 그 광경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더랬다.
순이 언니가 저쪽에서 큰소리로 말한다.
“이거 먹고 아픈 거 싹 다 물러갔음 좋겠다!!”
“그래그래, 아픈 거 다 물러가라!!”
나도 덩달아 소리친다.
“물러가라!!!!!!”
언니는 아이처럼 해맑게 연거푸 소리친다.
검은 봉지를 나물로 한가득 채우고 나서 힘겹게 일어선다.
“에고~에고”
언니는 봉지를 내 손에 쥐어준다.
“너꺼! 조금밖에 없네? 내꺼도 가져가.”
“아냐, 언니 먹어야지”
“나는 벌써 두 번이나 먹었어. 두 번이면 많이 먹은 거지.”
“두 번이 뭐이 많아? 먹고 또 먹고 해야지.”
“시려~ 너 먹어.”
챙겨주고 싶어 하는 언니 맘을 잘 안다.
상담소로 돌아오자마자 언니는 또 바삐 움직였다.
“강시리야, 까만 봉다리 하나 새 걸로 줘봐”
“언니 또 어디 가시게?”
“쩌~기, 검은돌 갔다 오게.”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다녀와요!!”
“그냥 운동하러 가는 거야.”
나물을 캐러 가는 언니의 발걸음이 즐겁다. 언니의 경제적인 사정을 잘 아는 지인들은 만 원을 쥐어드리고 언니가 캐온 나물을 사드리곤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방금 다녀온 길 건너 독바위는 벌써 대형쇼핑몰과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덤프 트럭들이 수시로 다니고 굴착기로 땅을 뻥뻥 뚫어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해간다. 변화를 거스를 수 없다면, 변화하는 공간 어디께 울 언니들이 머물 보금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