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두레방 상담소 활동가)
순이 아줌마와 현지 언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다
(천식이 심해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순이 아줌마의 월세 단칸방 머리맡엔 전화기 한 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현지 언니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그리 두었단다.)
*준: 두 분은 언제부터 이렇게 가깝게 지내신 거예요?
*순이 아줌마: 만난 건 오래 됐지. 내가 31살 때 빼뻘에 들어와서 봤으니까…
*현지 언니: 처음엔 서로 얼굴만 알았어.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 언니(순이 아줌마)가 두레방에 입적이 안됐다는 걸 알고 내가 소개시켜줬는데, 그때부터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내가 도와줄 건 없는지 살폈지.
*순이 아줌마: 얘(현지)가 정이 많아. 무슨 일 있으면 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 부모랑 동기간은 이제 다 죽고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조카들이 살긴 하지만, 그래도 무슨 일 있거나 병원 갈 일 생기면 얼른 전화하는 사람은 얘(현지)야.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전화해서 “시장에서 좀 사다달라고” 해. 나는 얘를 동생 삼았다고 생각하는데, 모르지. 지(현지)는 어떻게 생각할지. 귀찮아할 수도 있고…(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기색을 살피듯 현지 언니 얼굴을 흘끔 쳐다보셨다)
*현지 언니: 귀찮을 게 뭐 있어. 귀찮으면 안 오면 되지(웃음). 언니가 말 안 해도 나는 언니가 뭘 필요로 하는지 미리 알아. 그런데 나도 형편이 어렵다 보니까 솔직히 모른 척 할 때도 많아.
*순이 아줌마: 서로 어려운 처지에 뭐…빼뻘 들어와 이런 저런 사람도 많이 사귀어봤지만 다 소용없고 나는 얘(현지)를 많이 의지해.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진짜 가족보다 나아. 어디를 간다고 해도 현지가 안 가면 나도 안 가.
*준: 지난 6월 말에도 두레방 여름소풍 같이 안 간다고 하시다가 “현지 언니도 간다”는 말에 바로 합류하셨잖아요. (웃음) 승합차 안에서도 음식점에서도 현지 언니 옆자리를 고수하시고…진짜 현지 언니를 많이 의지하시더라고요.
*순이 아줌마: 내가 숨이 차니까 빨리 걷지를 못 해. 그러면 얘(현재)는 나를 항상 보고 있다가 기다려주고, 속도를 맞춰주지. 하다못해 다 같이 어딜 가다가도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가장 먼저 일으켜 줄 사람은 쟤야.
*준: 현지 언니는 왜 이렇게 순이 아줌마를 잘 챙겨주시는 거예요?
*현지 언니: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는 거야. 나는 하소연할 사람이 (순이)언니밖에 없어. 언니도 그렇지만 나도 어디 나가서 말 많이 하고, 목소리 높이는 성격은 아니야. (본인의 가슴을 가리키며)이 속을 다 까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이야. 딴 데 가서는 말 안 해.
*순이 아줌마: 내가 학교도 못 다니고, 배운 게 없어서 말을 잘 할 줄은 몰라도 원래부터 듣는 건 잘했어.
*준: 보통은 다들 자기 얘기하기 바쁘잖아요.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질린다는데 (순이) 아줌마는 다른 사람 이야기 들어주는 거 안 귀찮아요?
*순이 아줌마: 힘든 마음을 나도 아니까…귀찮지 않아. 저 사람이 오죽하면 나한테 와서 하소연을 하겠나 싶지. 이런 저런 이야기 들어주면서, 내 안에서 다 소화를 시켜. (이때 순이 아줌마는 냉장고에서 박카* 두 병을 꺼내 우리에게 건네주셨다) 다른 건 줄 게 없고, 어제 박카* 한 박스 사다놨지.
*현지 언니:언니는~, 숨차서 잘 걷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
(사실 현지 언니도 오늘 순이 아줌마네 온다고 박카* 한 박스를 사왔더랬다. 덕분에 순이 아줌마네는 오늘 박카* 풍년이 일었다. 우리 언니들에게 드링크제 하루 한 병은, 큰 돈 들이지 않고 그날의 피로와 더위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최고의 회복제이다.)
순이 아줌마: 과부가 과부를 모시다
*순이 아줌마: 주민등록상에는 많이 깎여 있는데, 내 나이가 본래 77세야. 보릿고개 시절, 우리 아부지가 나를 낳고 집을 나가버렸대. 그래서 엄마가 10년 동안 출생신고를 못해서 나는 학교도 못 갔어. ‘우리 막내딸 시집이라도 가서 잘 살라’고 내가 20살 무렵 일찌감치 시집보냈는데 그마저도 얼마 못 살고 혼자가 됐지. 당장 생계가 급하니 직장 구하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보니까 이렇게 저렇게 소개 받은 곳이 미군부대 기지촌이었어.
*준: 당시 친정 상황은 어땠어요?
*순이 아줌마: 3남매 중 내가 막내인데 우리 오빠랑 언니도 형편이 여의치 않다 보니까 내가 어머니를 보살펴드려야 했어. 어머니도 그렇고, 생계를 위해 1970년도부터 클럽에 들어온 거지. 내가 내 발로 그냥…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나중엔 우리 엄마를 아예 빼뻘로 모셔와 따로 방 하나 얻어서 10년 동안 모셨어. 다른 형제도 있지만은, 그 형제들이 안 모시니까 노인네가 갈 데가 없어서 나를 찾아왔어…과부가 과부를 모시게 된 거지. 내가 이 세계(!?)로 빠진 걸 엄마도 다 아셨어.
*준: 홀로서기만으로도 벅차셨을 텐데, 어머니까지 돌보시랴… 힘드셨겠어요.
*순이 아줌마: 우리 엄마 이름이 ‘임막내’야.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은 우리 막내(순이 아줌마) 때문이다. 나는 막내딸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죽었을 것”이라고 하셨어. 내가 엄청나게 깔끔해. 주변 사람들이 “순이 엄마는 하얀 한복에 고무신도 항상 깨끗이 닦아서 신고 다니신다. 순이는 엄마한테 지극정성이야. 순이는 효녀야”라고들 했어.
*준: 아줌마 어머니는 효녀 막내딸 덕분에 좋으셨을 것 같아요.
*순이 아줌마: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생각하면 설움이 북받쳐. 빼뻘에서 한 10년 같이 있다가 전라도 송정리에 사는 친언니가 모시고 갔어. 그 후엔 내가 일 년에 한 번씩 엄마 보러 송정리로 찾아갔지. 그런데 어느 해인가 가보니 엄마가 안 보여. “엄마 보러 왔는데, 안 보여 주느냐? 엄마 어디 계시냐?” 따져 물으니 언니랑 형부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을 안 해주더라고. 이상해서 계속 따졌지. 그제야 말해주기를, 노인네가 언니한테 말도 안 하고 갑자기 나가버렸대. 그 후로 3개월 동안 물어물어 겨우 엄마를 찾은 곳이, 성애양로원이었대. 알고 보니 엄마가 동네 노인들한테 정보를 얻고 혼자 거기(함평성애양로원)로 들어가신 거야. 당장 양로원으로 가서 “나랑 다시 빼뻘로 가자” 하니 엄마가 안 가시겠대. “여기엔 친구가 있어서 외롭지 않다” 하시더라고.
*준: 첫째 딸 집에서 지내시면서 외로우셨던 모양이네요.
*순이 아줌마: 하는 수 없이 나 혼자 빼뻘로 돌아왔지. 그때부터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양로원으로 찾아뵀어. 매년 설이면 100만 원씩 모아 양로원에 가지고 갔어. 중간에 양로원 근처에 있는 도매시장 들러서 노인네들 것까지 팬티 한 장씩 사고, 할머니들은 입이 항상 마르니까 사탕도 사고, 소고기 몇 근이랑 미역도 사서 갔지. 다 사고 남은 돈은 엄마 용돈하시라고 드리고. 그렇게 100만 원씩 매년 모아서 가져갔는데, 거기서도 한 10년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준:그때도 아줌마는 형편이 안 좋으셨을 텐데, 매년 100만 원씩 모아 임종하시기 전까지 찾아뵈셨던 거군요.
*순이 아줌마: 응. 나는 형편이 안 좋아. 옛날부터 지금까지 형편은 항상 안 좋아. 근데 우리 언니가 참 지독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양로원에 가보니 언니가 “야, 너 저기 엄마 배게 속에 뭐가 있나 가봐라, 우리는 그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하셨으니까 네가 가서 한 번 만져봐라” 하는 거야. 그래서 보니까 베갯잇 속에 300만 원이 넘는 돈이 있더라고. 우리 엄마가 나 준다고 쌈짓돈을 그렇게 모아 둔 거야. 내가 그걸 보고 어찌나 서럽던지 노인네 시체를 끌어안고 아침까지 꼬박 밤새 울었어. 엄마 얼굴을 비비고 젖가슴 보듬으면서 목 놓아 울었어. 그 설움, 그 눈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 끝을 모르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순이 아줌마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동안에도 내내 울먹이셨다. 그런 순이 아줌마 옆에서 듣고만 있던 현지 언니 역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순이 아줌마의 어머니, 임막내 할머님이 돌아가시자 순이 아줌마의 친언니는 엄마의 쌈짓돈 300만 원을 “반반씩 나누자” 했다고 한다. 순이 아줌마는 그 말에 억장이 무너져 친언니에게 욕을 퍼부었단다. 그러곤 순이 아줌마에게 물려주신 300만 원을 고스란히 함평성애양로원에 기증하였다. “여기 아니었으면 우리 엄마가 어떻게 사셨겠습니까, 이 돈으로 명절이나 때 되면, 여기 계신 할머니들에게 소고기미역국이라도 끓여주세요”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기지촌 빼뻘마을: 피와 살을 뜯어 먹으며 배 불리는 사람들
*준: 그간 살아오시면서 억울함이나 서러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순이 아줌마: 여기(빼뻘) 들어와서 아가씨들한테 나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현지 언니: 이 동네 전체가 아가씨들을 뜯어먹었지. (클럽) 업주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구멍가게고 빨래방이고 다 어떻게 해서든 돈 뜯어 먹을라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야. 아가씨들 빨래해준답시고 바가지 씌우고, 미제물건 핑계로 돈 떼먹고, 하다못해 내가 김밥이라도 한 줄 사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벗겨먹고 ‘잘 먹었다’ 말 한 마디 없어. 지금도 솔직히 빼뻘에 들어오고 싶지가 않아. (현지 언니는 현재 빼뻘에서 버스로 10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준: 옛날에 빼뻘은 어땠어요?
*현지 언니: 굉장히 무서운 동네였어. 그때는 (한창 빼뻘마을 기지촌이 성황을 이루던 7-80년대) 빚이 있거나 돈 벌이가 안 되면 바로 섬으로 팔려갔어. 빚을 갚았는데도 계속 빚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할 수밖에 없었지. 뭘 따지거나 하면 매 맞고 골방에서 두들겨 패고 그랬어. 내 옆방에 살던 어떤 여자도 팔려갔어. 그리고 한 번 팔려 가면 다시는 못 나온다고 하니까 무서워서 ‘빚이 있다’면 다 갚는 수밖에.
*준: 언니 눈도 그때 다치신 거잖아요.
*현지 언니: OO클럽에서 일하던 시절에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미군이 내 방에 들어와서 나무재떨이로 때린 거야. 140여 바늘을 꿰맸어. 과다출혈로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집에 있는 업주를 찾아갔더니 “네가 잘못해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 거”라며 욕만 퍼부었지. 경찰에 신고도 안 해줬어. 88년 12월 18일…날짜도 정확히 기억해. 의정부성모병원에서 꿰매고 돌아 온 날도 업주는 날 불러서 일을 시켰어. “이런 몸으로 어떻게 일하냐?”고 했더니 “지금 크리스마스 시즌이라서 장사를 해야 된다”는 거야. 병원비는커녕 보상도 못 받았지. (현지 언니는 당시 입은 상처로 안구가 밀려들어가는 증세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불편을 겪고 있다.)
*순이 아줌마: 그냥. 둘 다 여기서 더 이상 건강 나빠지지 않고, 지금 이대로만 살면 좋겠어. 서러울 것도 남을 미워할 것도 없고…나한테 해코지한 사람 원망해봤자 소용없잖아. 내 마음을 자꾸 다스리고, 풀어버려. 그나저나 나 오늘 의료원에 약 타러 가는 날인데 지금 몇 시지?
기관지 천식, 폐질환에 당뇨까지 앓고 계신 가냘픈 체형의 순이 아줌마는, 다른 사람의 고충을 잘 들어주었고, 그렇게 타자로부터 나눠가지고 온 근심의 짐을 자기 안에서 소화시키는 분이었다. 지난 삶 굽이굽이 쌓인 미움과 설움, 억울함과 응어리 역시 계속 풀어내야만 한다며 자기 자신과 옆에 있는 현지 언니를 연신 다독였다. 한편, 현지 언니는 그런 순이 아줌마의 집을 나서며 오늘도 이렇게 당부하신다. “언니! 여하튼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꼭 전화해. 날 불러요.”
지원과 보상은커녕 늘 치이고 내몰려 정리되지 못한 역사의 짐까지 힘겹게 안고 가는 사람들…한탄과 원망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필요하면 날 불러요” 당부해 줄 수 있는 순이 아줌마와 현지 언니를 만났다. 한편의 시처럼, 한 폭의 그림처럼, 가슴에 남아있는 이 두 사람을 떠올리자니 맴도는 노래가 있다.
Sometimes, in our lives, we all have pain, we all sorrow/Lean on me, when you’re not strong and I’ll be your friend, I’ll help you carry on/You just call on me brather, when you need a hand, we all need somebody to lean on/if there is a load, You hanve to bear, that you can’t carry /I’m right up the road, I’ll share your load if you just call me/Call me if you need a friend, call me…(「lean on me」, Bill Withers)
살면서 우린 때때로 아파하기도, 슬퍼하기도 하죠/당신이 강하지 못할 때 내게 기대요. 그러면 당신의 친구가 되어 도와줄게요/그냥 날 불러요, 친구여,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해요/ 만일 당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이 있다면/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내가 그 길을 따라가서 짐을 나눠들게요/친구가 필요하면 날 불러요, 나를…(「내게 기대요」, 빌 위더스)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을 부당하게 착취하며 이득을 취한 이들과 사회, 국가는 지금도 여전히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역사의 잘못에 대해 구체적 반성과 해결책 없이 지나쳐 와 버린 실수를 우리는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