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역사교사모임에서는 7월 27~28일, 2일간 분단의 그늘, 동두천과 의정부 미군기지 답사를 진행했다. 동두천과 의정부는 둘 다 모두 한국전쟁 이후 미군 기지촌 주변에 형성된 상권에 의해 인구가 유입되고 달러가 돌면서 성장한 도시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분단국가, 휴전선 인근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해야하는 안보도시 역할을 감당하면서 만난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주한미군의 범죄에 외교적으로 평등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가난하고 어린 여성들이 자국의 영토에서 ‘미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인격,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포기하고 살고 있었지만 가족에게도 잊혀지고, 지역사회에서도 이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역사적으로도 부끄러워 지우고 싶은 대상이었다는 걸 알았다. 상패동 공동묘지와 낙검자수용소는 기지촌여성의 어두운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물음을 던져주었다.
특히 의정부의 미군기지 역사에서 소개하고 싶은 지점이 두 개였다. 하나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중학생 미선·효순 사건의 규탄대회가 열렸던, 그리고 매년 추모제를 했던 ‘미2사단 사령부 CRC부대’이다. 또 하나는 이번 미군기지 답사를 통해서 여러 선생님들께 문혜림여사와 두레방운동을 소개해드리고자 많은 준비를 했었는데 그 <두레방> 사무국이 있는, 쇠락한 기지촌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빼벌’이다. 특히 <두레방>운동과 관련해서 지금 <이한열기념사업회>와 <문익환통일의집>에서 활동하는 문혜림 여사의 따님 문영미 선생님, 10년 넘게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금은 영어를 배워가며 기지촌의 외국인 여성들을 지원하는 <두레방> 쉼터 김태정 소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가졌는데 참가하신 모든 선생님들께서 깊이 몰입해주셨고 울림이 있는 시간이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김태정 소장님이 광동여고 시절 김태우 선생님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결국은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의정부 두레방운동이 해온 질문들
기지촌에서 ‘양공주, 양색시’로 불리는 여성들, 어느 누구도 그녀들에게 관심 두지 않았었던 시절, 의정부 두레방운동은 그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기지촌여성 문제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알게 해주었다.
술집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지촌으로 오거나, 공장 일자리인 줄 알고 속아서 기지촌에 들어온 여성들은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성매매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본인도 모르게 알선업자의 소개비를 빚으로 떠안았다. 이들이 자력으로 기지촌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특히 이 곳 빼뻘은 ‘한 번 발을 들이면 빼도 박도 못 한다’는 의미로 통했다.
미군들은 일주일 내내 사람 죽이는 고된 훈련을 받으니 적어도 주말에는 부대 밖으로 나가 스트레스를 풀고 즐겨야한다는 게 용인되었고 매춘이 은연중에 권장되었다. 성매매를 금지한 한국정부가 미군 기지촌여성들을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하면서 기지촌의 성매매를 방관하고 묵인했다. 심지어 국가 차원에서 성병을 관리하는 등 기지촌을 육성한 것이니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군대문화는 물론이거니와 여성의 성을 도구로 삼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기지촌 여성들은 윤금이 씨 피살사건과 같이 혈기왕성한 군인들을 상대하면서 미군 범죄의 희생자가 된 경우가 많았지만 보호받지 못했고, 기지촌 밖 사람들에게도 힘든 노동은 하기 싫어 술 먹고 놀며 돈을 버는 게으른 여자, 섹스를 밝히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여성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인격적으로 무시될만한 사람들이었나?
이 가난하고 고립된 여성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두레방>은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했을까? 기지촌에서 한평생을 보냈지만 특별히 돌아갈 곳이 없어 아직 송산동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그녀들, 이제 늙고 힘없어진 그녀들을 부양하겠다고 찾아오는 가족은 거의 없다. <두레방>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녀들, 언니들을 맞고 있다. <두레방>을 찾아오는 그녀들이 존엄하게 나이듦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까? 빼뻘의 미군기지가 반환되고 송산동 재개발이 진행되면 여기 살고 있는 언니들과 <두레방>은 빼뻘을 떠나야 하나? 의정부 미군 기지가 철수, 반환되고 있지만 의정부 기지촌여성의 역사는 지역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워져야 하는 역사인가?
미군과 동거하다가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이 여성들의 삶이 해피엔딩이 많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운영되는 동두천이나 평택의 기지촌, 이곳 여성들 상당수가 이주여성(필리핀, 태국, 러시아여성 등)으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바뀐 것이 없지 않은가? 기지촌의 성매매와 폭력, 차별을 용인하는 기지촌안의 카르텔은 여전히 공고하다. 코리언드림을 꿈꾸는 이 이주여성들에게 <두레방> 활동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나?
군사도시에서 평화도시로, 의정부 시민운동과 <두레방>의 연대
의정부 시민과 학생들은 2015년, 미군기지 홀링워터 자리에 ‘평화의소녀상’을 세웠었다. 의정부에 ‘평화의소녀상’을 건립하면서 우리 지역의 또 다른 아픈 역사였던 미선이와 효순이를 기억하자고 했었다. 사건 당시 미선이 효순이의 언니가 재학했던 의정부여고의 학생들이 미 2사단 사령부인 의정부 가능동의 CRC앞에서 추모집회에 참여하고 그해 겨울,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의 촛불시위로 이어져 시민 차원에서 한미관계에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리자고 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의정부 미군기지촌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을 미군‘위안부’ 여성, 그리고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두레방운동과 연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이제라도 의정부의 미군기지 공여지 활용에 대한 시민 차원의 공익적 논의를 시작하면서, 마을의 시민을 키우는 역사교육을 위해 지역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는 역사교육의 실천을 모색하면서 만들어진 <두레방>과의 연대가 참으로 뜻 깊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어두웠고 아픈 기억이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움직임이 있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때부터 진심으로 다가가는 공동체운동, 슬픔에 공감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연대하는 운동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있었다는 자부심이 의정부를 군사와 안보도시에서 평화도시로 만들어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국가정책의 변화로 주어진 결과가 아닐 것이다. 분단의 그늘에서 발전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발전이 제약되었고, 안보를 내세웠고, 정작 주민의 안전한 일상은 침해받고 있었지만 시민운동과 연대의 힘으로 평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의정부의 현재를 볼 수 있었다.
<두레방> 설립자 문혜림 선생님도, <두레방> 쉼터 김태정 소장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친정집, 언니네집이 되어주는 일을 해 오신 것이었다. 두레방과 의정부 시민사회, 역사교육과의 만남이 더 깊은 연대로 이어갈 수 있어야겠다.
*사진제공: 의정부역사교사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