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도 지나고,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입니다. 지난여름 유난히 덥던 8월 한 날, 한낮의 내리쬐는 햇빛을 뚫고 <레즈비언문화배급소놀레>에서 4명의 손님이 두레방을 방문했습니다. 그날 동두천을 중심으로 의정부까지 기지촌을 같이 걷고 멈추고 또 걸었는데요, 이후 저마다 떠올랐던 느낌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내주셨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감사함을 느끼며 기지촌 평화기행 참가자 4분의 소감 전문을 읽어보시죠.
Ⅰ. 우리는 지난 역사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얘기해야 한다
동두천과 의정부 빼뻘마을 기지촌 골목, 낙검자수용소의 방들, 야산의 묘지들. 책에서 보던 기지촌의 역사 속을 걸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그 속에서 생활했을 언니들의 모습이 상상되었고,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시간과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현장을 걸었을 때는 가슴이 먹먹하고 공포스러운 느낌 때문에 어떤 말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기지촌은 과거를 넘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역사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얘기해야 한다. 누구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보상해주지 않았던 시간. 나는 그날, 우리들의 이 역사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아직 답은 찾지 못했지만, 그날의 골목들과 방들 묘지들, 삶과 죽음의 긴 시간을 걸으면서 이제 현재를 걸어 가보려 한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 공포를 넘어서 함께 말이다.
Ⅱ. 가려진 이 공간에서, 당시 여성들은 매일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연히 <동두천 기지촌 평화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면서 지인들과 함께 동두천 기지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기지촌성매매가 궁금하였다. 불법 성매매, 하지만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성병관리를 해온 1970년 그 시절, ‘애국자’라 오도하며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던 그 곳, 그리고 아직까지 영업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성지순례 하는 마음으로 다녀왔다.
동두천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길을 잘못 들어 00동 클럽거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순간이지만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좁은 골목은 뭐지?’, ‘길을 잘못 들었나?’, ‘왜 이렇게 한산한 거야?’, ‘저기 보이는 외국인은 군인인가?’, ‘다 영어간판이네…’ 묘하고 묘한, 한 마디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광경에 잔득 긴장되었다.
오랜 반성매매활동가의 감으로 이곳이 성매매업소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더욱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알던 성매매 공간은 늘 우리 주변에 침투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성매매가 폭력이다’라는 사실에 대해 무뎌지게 만든다. 예를 들면 성매매집결지와 유흥업소 주변에는 학원, PC방, 약국, 편의점 등이 늘 함께 했고, 많은 한국사람들이 주변을 걸어 다녔다. 하지만 동두천 클럽거리는 드문 인적과 좁은 골목, 클럽 건물 입구에 걸려있는 CCTV까지..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 당하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물이 기름을 밀어내듯 그렇게 힘껏 나를 이 공간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불편했기에 공간으로부터 멀어지는 마음이 반가운 동시에 불편하였다. 스스로 그 공간과 격리되고 분리된다면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보지 않으려 한다면 눈 감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이 요동칠 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 공간을 방문하기 전 내가 가졌던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클럽 골목을 한 시간 정도 돌고나서 소요산에 위치한 (성)낙검자수용소 일명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보건소에서 성병검사 후 통과하지 못한, 혹은 미군이 개인적인 근거로 지명한 여성들을 수용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미군에게 성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여성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하여 강제치료를 하였다. 페니실린의 부작용으로 죽어나가는 여성들이 많았고, 주사가 아프고 두려워 탈출을 시도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은 여성도 많다고 한다. 몽키하우스 1층 입구를 통해 옥상까지 한 층 한 층 꼼꼼히 공간을 둘러보며 올라갔다. 구조는 총3층 건물에 각 층마다 대략 4~6개의 방이 있었다. 방은 여성들이 탈출할 수 없게 튼튼한 철망으로 되어있고, 원룸보다도 작은 방의 크기에 50명 정도 수용하였다고 하니 당시국가의 ‘성병균 퇴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된다. 지금은 버려진 공간이며 담쟁이마저 건물을 덮어 몽키하우스 옆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가려진 이 공간에서, 당시 여성들은 매일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Ⅳ. 성매매여성 성병낙검자수용소-몽키하우스 “철거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다른 나라 여러 곳에 무서운 유적지들을 다녀왔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숨이 막히고 몸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공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공간은 다른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잊혀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건물 앞에는 무성한 잡풀들이, 안에는 쓰레기와 빈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장소. 누군가에게는 감추어야하는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장소, 다른 ‘정상적인 삶’들과는 유리된 해괴한 곳,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동네의 흉물스러운 건물일 뿐이겠죠. 하지만 여성들에게 이 공간은 기억되어야 하는 공간입니다. 보존되고 알려져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사람을 쓰고 버리듯 하는 비인간적인 야만과 기만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야산에 버려지듯 묻혔던 소중한 생명들의 이야기는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저에게는 저의 역사와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건물이 철거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공간이 잘 지켜지도록 작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Ⅲ. 잊혀진 기억
동두천, 80년대에 잠시 책에서 접한 기록들, 미군부대 양공주 90년대 윤금이 사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다. 동두천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미군들이다. 생소하고 거북스러웠다. 미순이효순이 사건이 겹치면서 우울하고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두레방 활동가 선생님들의 동두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먼저 보산동 기지촌 클럽거리를 둘러보고, 몽키하우스, 이름 없는 언니들의 묘지까지 순차적으로 둘러보면서, 특히 몽키하우스에서 일어난 언니들에 대한 국가의 만행을 듣고 충격과 분노보다 무력감이 들었다. 지금도 별로 변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기지촌은 잊혀지기를 강요하는 여성의 또 다른 역사이다 그래서 나에게도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번 동두천 방문은 부담스럽지만 잊혀진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과 착취의 기억들을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상세한 설명을 해준 활동가 선생님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