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길희연
군사제국주의. 길고도 긴 말이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텅 빈 단어인 것 같다. 하품이 나오는 신문기사나 억지로 읽어야 하는 논문에나 등장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나의 남자친구는 미군이다. 우리는 데이팅 어플에서 만났다. 걔를 처음 만난 날, 그는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가 미국 바깥에 있는 미군기지 중 가장 크다고 말해줬다. 신기했고 조금은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서울에서 기차로 겨우 40분만 가면 있는 곳에 그렇게 큰 규모의 주요 군사기지가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그 어플을 다시 켰다. 그랬더니 계속 스크린에 뜨는 수많은 미군들이 보였다. 그렇게 내 연애사에 미국의 군사주의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몇 주가 지나서 걔를 만나러 평택에 갔다. 저녁을 먹고 어떤 바에 갔는데, 사장 언니가 나를 불렀다. “너 쟤랑 사귀니?” “아니 아직은 아니에요. 어차피 곧 미국으로 돌아가요.” “그럼 너 여기서 일해, 여기서 일하면서 새 남자친구도 만날 수 있어.” 그때 나는 살짝 고민했다. 돈도 없고 야간에 하는 일이라 시급도 높을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사장 언니가 나한테 시키려고 했던 일이 미군들에게 웃어주면서 술을 파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말로만 듣던 주한미군 전용 클럽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 그 세계가 나한테 이렇게 한 순간에 들어올 수 있구나. 나랑 이렇게 가깝구나. 어떻게 여태까지 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지냈지… 주한미군들의 존재가 이렇게 유령처럼 깃들어 있구나…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게, 경기도의 기지촌은 새로운 세계였다. 사장 언니의 말을 이해하고 난 뒤, 나는 위험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험프리스 안에서 나를 쳐다보는 카투사 동생들의 깔보는 시선을 보았다. PX에서 일하시는 캐셔 분들의 탐탁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았다. 서울의 거리에서도, 머리가 짧고 피부색이 어두운 군인이랑 걸어 다니던 나를 쳐다보는 불편한 눈길들을 보았다. 서울의 이름난 대학에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미군을 사귀는 여자애” 이름표가 붙고 나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그 같은 시선을 감내하며 자발적으로 연애할 수 있는 나의 특권 또한 깨달았다. 당시 나는 중소기업에서 번역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특성상 빈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많은 시간을 혼자 기지촌에 대해서 읽으며 보냈다. 놀라운 수치들을 보았고, 충격적인 증언들을 읽었다. 수도 없는 논문을 읽었지만, 긴 시간 잊히거나 지워진 역사였기 때문에 기지촌의 생태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글로만 기지촌을 알아가는 것이 답답했다. 번역 일을 그만두고 두레방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기지촌의 문제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 문제들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두레방에 전화를 걸었고, 올해의 ‘두레방데이’에 초대받았다.
행사 전날 나는, 당일 함께 나눠먹을 음식을 만들면서 준비했다. 무엇을 기대해야 할 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긴장도 되고 걱정도 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평소보다 이르게 잠을 청했고, 일찍 일어나 두레방으로 향했다. 도착과 동시에 행사의 세팅을 돕고, 쭈뼛쭈뼛 옆 골목길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 내게 들려오는 목소리. “이리 와서 같이 피워” 언니들이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 또 쭈뼛쭈뼛 음식을 접시에 담아 ‘이걸 어디서 먹지’ 고민하던 찰나, 그때도 누군가 날 불러줬다. “이리 와서 같이 먹어요” 필리핀 여성들이었다. 밥을 먹고, 장터에서 물건을 팔고, 공연을 보고,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내가 글에서 읽던 슬픔이 넘치던 기지촌의 느낌과 두레방데이에서 만난 이들은 달랐다. 그날은 힘이 넘쳤고, 그만큼 큰 에너지를 받았다. 그래서 두레방에 대한 나의 거침없는 첫인상은 ‘이 세상에 이렇게 멋지고 행복한 장소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곳은 멋진 것 혹은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지촌의 전성기 때부터 일하셨던 언니들, 그리고 지금도 일하고 있는 수많은 이주여성들의 절박함이 있는 곳이다. 착취적인 구조에서 일했고 일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 생기는 빠져나가기 힘든 문제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두레방이다. 그러나 두레방데이에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의 신나는 기분이었다.
기지촌은 함께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공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끼리만 아는 과거를 살았고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두레방의 함께는 특별하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나누면서 공동체가 된다.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공동체는 나의 존재에도 필수적이다. 그들은 함께 있지 않으면 어둠 속으로, 과거 속으로 사라질 이들이다.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공동체의 안락함도 없고 나의 존재를 보장해줄 이들도 없다. 우리는 기지촌의 과거와 현재를 미래에도 계속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두레방의 ‘함께’를 꼭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두레방데이에서 내가 본 것은 슬픔과 아픔보다는 함께의 힘이다.
언니들은 모여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고 날아가는 풍선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주여성들은 손뼉치고 환호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그들이 어떤 과거를 살았던지 간에, 그리고 오늘도 어떤 곳으로 출근하던지 간에, 그들의 웃음은 말한다. 자신들이 있다고, 무서운 과거를 살았지만 지금도 살아 있다고. 그리고 그 과거가 다른 얼굴로 지속되고 있다고.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는 것. 두레방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그들의 존재를 큰 목소리로 알린다. 그것 자체가 이미 큰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