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김정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공동대표
개인적으로 기지촌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는 10여 년. 기지촌여성인권연대활동을 한 지도 만 8년이 다 되도록 군산 아메리카 타운을 한 번 가보았을 뿐, 경기도 일대 기지촌 역사기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두레방, 햇살사회복지회 등 현장 단체 분들과 늘 함께 하니 우리가 만나고 회의하는 그 장소가 바로 역사적인 장소려니 하고 무심코 넘어갔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맘속에는 늘 제대로 된 기지촌여성 역사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마침 평택에서 (가칭)기지촌여성역사관 추진단이 꾸려져 역사관 건립 논의가 시작되면서 평택시민재단과 햇살사회복지회와 두레방의 수고로 6월 19일(금)에 경기도 북부 기지촌을 도는 기행을 하게 되었다.
늘 버려지고 잊히고 기록되지 않는 여성의 역사.
어차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여성의 목소리는 드러내야 하고 경청되어야 하며 기록되어야 한다. 남성만의 역사(history)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특히 국가와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피해를 당한 여성의 목소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문서와 자료를 담을 역사적인 공간은 필수적이다. 새롭게 짓는 건물이 아닌 피해여성들의 땀과 눈물과 한이 맺힌 역사적인 공간이. 하루 일정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이번 역사기행에서 나의 목표는 이런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6월 19일 아침 11시. 평택에서 출발한 대형버스가 두레방에 도착하고, 나를 포함한 다른 지역 개인 참가자들이 개인적으로 합류하여 총 22명의 인원이 두레방에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간단한 참가자 소개 후 두레방과 빼벌에 대한 김은진 원장님의 설명이 있었다. 두레방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정식 설명을 듣기는 처음이었고, 빼벌 지명의 유래나 빵 공장 얘기 등 여러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두레방 건물 자체가 원래 기지촌여성 성병검진 보건소였던 곳이라 역사관으로서는 제격이다 싶다. 두레방에서는 경기도나 의정부시에 역사관화를 건의하고 있으나 여러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에 대해 일반인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추진해 보는 건 어떤가라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어진 캠프스탠리 현장 탐방. 60년대엔 미군부대 뒷문으로 쏟아져 나온 미군들로 거리가 넘쳤다는 빼벌이 이젠 인적 드문 유령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레방에 나오는 한 언니가 살았다는 집도 보고, 그녀가 당한 폭행 이야기도 들으면서 걸음을 옮기니 마을 끝에 자리 잡은 미군부대 후문 출입구가 보인다. 미군이 주둔하는 것 같진 않았고, 사람의 접근을 막는 담벼락 위 철조망 하며, 통금시간을 알리는 공지문 하며, 굳게 닫힌 출입구가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왔다. “이 땅이 뉘 땅이냐?”는 외침이 저절로 나왔다.
미군기지의 우울한 유산이자 상징적 음식인 부대찌개로 점심을 먹고 양주시 광적면에 있는 효순·미선 평화공원으로 향했다.지난 6월 13일에 18주기를 맞아 완공식에 참석했는데 1주일 만에 다시 오게 되었다. 2017-2018년도에 잠깐 평화공원조성위원회 대표를 맡은 적이 있었던 터라 조성 경위는 대강 알고 있었으나, 2019년에 공무원 신분이 되어 사의를 표하고 현재는 뒤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 항상 착잡한 심정으로 추모식에 참석했다. 만화가와 디자이너가 꿈이었다는 어린 두 여학생 효순이 미선이, 거대한 장갑차, 한국 법정을 비웃는 가해자들, 2002년 광화문 촛불, 사건현장에 미군이 세웠던 뻔뻔한 문구의 추모비, 완공식에 참석한 효순 양 아버지 신현수 씨의 까맣게 탄 얼굴…. 여러 가지 생각과 장면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도대체 우리에게 미국이란 존재는 무엇일까? 왜 미군은 이 땅에서 저렇게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유유히 한국 땅을 떠날 수 있는 걸까? 비굴한 사대주의, 교활한 친미옹호론, 자존감과 줏대를 내 팽개친 공무원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 졌다. 하지만 순수 시민들의 성금과 손길로 지어진 평화공원은 끝내 이 땅에 자주의 서광으로 남으리니.
다음으로 향한 곳은 동두천 광암리 턱거리마을 박물관. 미군기지 캠프호비 인근에 위치하고 있고 주민들의 힘으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예술활동도 하는 곳. 클럽을 다시 손보아 살려 낸 마을회관의 성격으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살려내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벽에 걸린 주민 3명의 생애사는 기지촌여성이 아닌 분들의 것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함께 살았던 마을 주민들의 구술사도 필요하다는 생각, 오랫동안 그리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LNG복합화력발전소를 등에 지고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목소리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주민과 함께 하는 모습으로 기지촌여성역사관이 세워진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턱거리마을이 빼벌처럼 스산해지고 쇠락했지만 부디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귀한 공동체 마을로 살아남기를 바라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최희신 국장의 안내로 동두천 보산동 캠프케이시 정문 앞 ‘윤금이 씨 피살 사건 현장’을 둘러보았다. 골목이 정리되어 당시 그의 집이 있었던 곳은 헐려 없었고, 최 국장은 살해 당일 윤금이 씨가 묵었던 방의 위치를 특정하며, 그 동그라미 위에서 내내 설명을 이어갔다. 반드시 그곳에 윤금이 씨 추모비를 세울 것을 다짐하면서.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으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사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법정에서 가해 미군이 재판받은 사건, 가해 미군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이 청주교도소에서 한국인들이 요구하던 SOFA개정 소식에 비난 댓글을 달았던 사건… 다시 한 번 이 나라의 주권은 어디 있는지 통곡하며 묻고 싶다.
다음으로 간 곳은 동두천 상패동 무연고 묘지.수천수만의 알 수 없는 무덤들이 즐비한 곳. 여름의 억센 풀숲이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곳. 하루가 멀다 하고 기지촌여성들의 꽃상여가 드나들었다는 곳. 명패도 봉분도 없이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여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졌다. 여성의 인권이란 무엇일까? 이들의 악착같이 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한반도 여성들에게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걸까? 국가의 공권력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다시 분노지수가 높아진다. 미리 챙겨 간 낫으로 몇 개의 무덤이라도 풀을 베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질 않았다. 핑계대지 말고 다음에는 한나절이라도 시간 내어 혼자 올 것.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소요산 주차장 인근에 있는 낙검자수용소, 일명 몽키하우스.사진으로 보면서 어떻게 이런 곳이 아직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눈으로 직접 보니 마치 유령의 집에 나오는 폐허를 연상시켰다. 잡초가 우거지고 건물은 창문이 깨지고 벽은 성한 곳이 없고, 난간 철근도 다 뜯어가 버린 곳. 아무나 갖다 버린 온갖 쓰레기들로 뒤덮인 곳. 밤낮으로 낯선 사람들이 오가며 온갖 지저분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곳. 그들은 이곳이 어떤 곳이었다는 걸 알까? 두레방에서 오랫동안 언니들의 곁을 지켰던 김태정 소장은 이곳을 거쳐 갔던 언니들이 겪었던 처참한 이야기를 참석자들에게 전하며 온몸으로 울었다. 법도 없이 이들을 감금했던 자들은 우리들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공무원들이었다. 물론 정점엔 박정희라는 희대의 독재자가 있어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서라면 미군을 끌어들여 자국민인 기지촌여성의 인권을 짓밟아도 좋다는 판단을 했겠지만 그 밑에서 지시를 이행했던 공무원들은 죄가 없을까? 아니다. 이들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아이히만들’에게 생각하지 않는 죄, 타인의 피눈물에 공감하지 못하는 죄, 최소한의 양심과 인권의식을 갖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죄를 물어야 한다. 비록 폐허지만 건물이 기본 형태를 갖추고 남아 있는 이유도 신기했다. 사학재단과 동두천시의 보상비를 둘러싼 갈등이 오히려 이 건물을 살아남게 했다는데 우리는 “아마 이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언니들의 원한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방들을 둘러보니 ‘식당’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2층엔 언니들이 수용되었던 방이 군대 내무반 형태로 남아 있다. 낙검자수용시설까지 군대식을 본 떴던 지독한 군사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이 입맛이 썼다.
낙검자수용소는 두레방 보건소 건물과 마찬가지로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고 리모델링을 한다면 훌륭한 역사관이 될 것 같다. 1층은 자료관으로, 2층은 체험실이나 교육홍보, 또는 세미나 실로, 3층은 야외전시장이나 공연장 등으로 시민과 함께 하는 공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출입구의 커다란 쇠문이 철커덩 소리를 내면 수용되는 기지촌여성의 심장도 쿵하며 내려 앉게 만들었던 널따란 앞마당은 텃밭이나 놀이시설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자연스레 역사공부를 함께 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다.
군사주의의 횡포에 처절히 당해야만 했던 한반도 여성들의 역사. 이제는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 우리는 그 공간을 꼭 만들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