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희수 목사(행복한사람들의교회)
집에서 40여 분, 택시를 타고 두레방 앞에서 내리자 하얀 일층 건물 앞 일행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낡은 건물 안에는 소박한 환영의 음료와 함께 발열체크가 한창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나누는 인사소리가 한적한 마을에 즐거운 소란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파란 하늘과 내리쪼이는 햇살처럼 따사롭고 평온한 가운데 기지촌 역사기행이 시작되었다.
1986년 세워진 기지촌 여성인권운동 단체인 ‘두레방’은 사무국과 쉼터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무국이 위치한 빼벌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규모가 커지고 부흥했지만,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한 뒤 현재는 휴업한 상점들과 과거의 흔적만 남아 있는 조용하고 오래된 골목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약 15년 전에 햇살사회복지회가 햇살센터였던 시절 간사로 3년간 일한 인연이 있었다. 캠프 험프리스가 있던 안정리는 오래된 상점들이라도 번화한 거리가 여전했고, 기지 이전을 앞두고 새집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반해 빼벌마을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물론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부대 후문까지 걸어갔다 오는 길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한산했다. 두레방의 활발하게 진행하는 활동들과 대조적이었다. 김은진 원장(두레방 상담소)은 그 거리들이 사람으로 꽉 차 걸어 다니기도 힘든 길이었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허름한 클럽간판들이 세월을 겪어 녹슬었고 곳곳에 클럽으로 들어가는 철문에는 마을음악회 포스터가 빛바랜 채 붙어 있었는데, 지난 해 열린 행사였다. 이 마을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생각하니 낯설었다.
낮은 지붕들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가 기지촌여성들이 살았던 좁은 집이 폐허가 된 채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을이 주는 정적과 같은 느낌은 아마도 그런 풍경들이 번성했던 지난 시절을 상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곳, 낯선 이들과 낯선 문화가 생기를 불어넣었던 곳, 사건이 일상이었던 곳. 마을 이름인 ‘빼뻘’의 여러 유래를 설명하면서, 이은우 대표(평택시민재단)는 ‘한 번 들어오면 발을 뺄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가 당시 여성들의 삶과 닮았다며 가슴을 쓸었다. 그 운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단어가 기지촌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그런 슬픈 운명적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해 수십 년을 애써 온 두레방이나 햇살사회복지회를 비롯한 여성들의 연대와 수고가 ‘빼벌’의 새로운 의미로 새겨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두레방을 나와 ‘효순·미선 평화공원’에 도착했다.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에 치여 중학생 효순이와 미선이가 사망한 현장 위에 만들어진 추모의 공간이자 당시 시민들의 분노를 기억하고자 세워진 이 공원은 지난 6월 13일 완공식을 가졌다. 사고를 낸 미군 병사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며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모습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주한미군에 의한 범죄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 이후 끊임없이 있어왔다. 특히 기지촌여성들에 대한 범죄는 윤금이 씨 사망사건으로 크게 알려졌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여학생회의 사진전을 통해 그 끔찍한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눈을 의심했다는 흔한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흑백사진 속 처참한 장면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워 설명을 읽어볼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은 어떤 신앙적 회심보다 강력한, 지금까지의 삶을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 자국민을 살해해도 처벌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조약에 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분노할 일인지는 주한미군범죄운동본부의 소식지 ‘평화의 불씨’를 통해 배웠다. 교회여성들과 시민단체들이 싸워 왔기에 현재는 미군범죄는 줄고 국가적 관심도 높아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효순미선 평화공원’은 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이들의 자발적인 헌신 가운데 만들어진 곳이다. 이번 기지촌역사기행의 길에 멀리 돌아가면서도 이 곳을 들리려던 주최자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남아 있는 이들의 일상 속에 이어가는 일을 본격화 한 턱거리마을박물관은 평택에 ‘기지촌여성인권역사관(가칭)’을 세우려는 추진단이 이 기행을 기획한 본격적인 이유기도 했다. 동두천이 흐르는 캠프 호비 입구에 자리한 박물관은 기지촌이 번성한 당시 클럽이었던 곳을 재건축해 기지촌에 남아 있는 할머니들의 인생이야기를 기록 전시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 활동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기지촌여성들 또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술하고 공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운영하는 김현호 신부님은 지역사람들과의 협동을 통해 ‘마을살리기’와 ‘갈등해결을 위한 활동’으로부터 외형보다 ‘관계회복’에 더 힘을 쏟았다며 그 사업들을 소개했다.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아트스튜디오를 기획하여 마을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이 턱거리 마을을 향한 그의 비전이었다. 「턱거리 마을신문」을 발행하고 그곳에 여성들의 생애사를 실었는데, 기지촌에서 살아오신 가장 전형적인 분들의 삶을 기록하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했다. 여성들뿐 아니라 지역에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주민워크숍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가는 일 가운데 마을의 풍경이 어우러져 우리의 기획도 큰 힘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살아간 여성들의 흔한 이름을 따서 만든 ‘순자문화제’가 어떻게 마을 사람들의 행복한 잔치가 되어줄지 기대가 되었다.
뭔가 희망적인 상상을 펼칠 수 있었던 박물관을 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기지촌의 가장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기지촌여성들이 무연고자로 묻힌 상패리 공동묘지 언덕과 윤금이 씨의 집터 그리고 성병에 걸린 여성들을 감금하던 낙검자수용소다. 풀이 무성한 언덕에 작은 봉분들 사이 비죽이 나온 검은 나뭇조각만이 그저 누군가의 무덤임을 알게 해줄 뿐이었다. 그 언덕이 끝을 알 수 없는 산으로 이어진다는 가이드분의 설명에 과거를 미루어 떠올려봤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 시절 어리고 가난했을 여성들이 전쟁의 공포 가운데 번화한 기지촌에서 낯선 미군들을 통해 생계와 삶을 이어가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여성들 스스로 꽃상여를 만들어 애도하며 보내줬을 슬픈 우정의 장례식 말이다. ‘성병관리’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벌인 폭력에 아무 힘도 없는 여성들이 창살에 갇혀 고통과 두려움 속에 죽어나간 것을 알기에 더욱 슬펐을 것만 같다. 낙검자수용소는 폐허처럼 버려진 풀밭에 서 있는 위용만으로도 공포를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녹슨 철망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갇혀 독한 주사를 맞고 죽음에 실려 나가는 이들을 보며 얼마나 허무했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낙검자수용소 경험에 대해 기지촌할머니들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김태정 소장(두레방 쉼터)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힘들어했다.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때 국가가 지켜줄 수 없었던 시절, 붙잡아 줄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안타까운 구술을 마음으로 들을 때 한없이 안타까웠던 심정을 듣는 이들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위태로운 삶에 안전한 지지대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을 심어 준 슬프고도 고마운 순례였다.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둘러본 지금의 기지촌은 내 스무 살에 만난 윤금이 씨의 사진처럼 비참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은 없었다.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틀로 설명될 수 없듯이, 당시에 기지촌에 살아간 사람들과 그 시절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할머니들,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공유하는 이웃들과 어떤 오늘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오랫동안 알고 있던 두레방을 이제야 찾아가 직접 만나고 보니 희미했던 인상이 보다 선명해졌다. 그렇게 만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씩, 한 명씩, 그 만남을 이어가다 보면 더 선명해지는 사연이 있고, 풍경이 있고, 사람이 있고, 역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