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진 원장(두레방 상담소)
K 언니 사망신고를 하고 오는 날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둘 눈송이가 날렸습니다. 그날은 S 언니가 퇴원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1986년 설립 당시부터 두레방과 함께한 언니들이 두레방과 같이 나이 드시며, 눈송이 같이 스러집니다. 2014년 6월 25일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했던 122명의 피해여성들 중 8명이 사망, 현재 114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발 끈을 조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으로 힘겹고 어려웠던 2020년이 막을 내렸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상황에 혹자는 지난 2020년은 없었던 걸로 하고 2021년을 2020년으로 하자는 웃지 못 할 농담을 합니다. 두레방 역시 2020년 한 해가 힘겨웠습니다. 집합금지단계가 계속되면서 내담자들과 일상상담을 하는 일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아웃리치를 나가는 일도, 소풍을 가는 횟수도 줄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주여성들의 생계가 심각하게 위협받았습니다. 두레방은 이주여성들의 긴급재난금 지원을 위해 집중하였고, 여러 곳에서 후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된 2020년 전반기에는, 몇 분의 언니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사하셨습니다. 의료지원이나 생활지원, 이주여성을 위한 법률지원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4월 ‘경기도 기지촌여성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통과 되면서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에서 ‘경기도 기지촌여성 생활실태 및 지원정책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관에서 보고서를 발표한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두레방상담소에 새로운 활동가가 들어왔고, 쉼터에서는 당사자활동가를 본국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다사다난한 나날들 속에서도 하나님 돌보심의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한 사람이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나는 현재 상황을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바닥을 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에서 시작하기. 이것이 절망만이 가진 가능성이다. 근거 없는 희망보다 생산적인 절망이 필요하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235-236쪽, 정희진)』여성학자 정희진 님의 글처럼, 지금 우리의 상황이 바로 끝까지 가는, 바닥을 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역시 현재의 상황을 대면하여 생산적인 절망을 통해 희망으로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새해에는 대법원에 계류되어있는 ‘한국 내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승소하고, 정춘숙 의원이 대표발의한 ’미국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법이 통과되기를 소망합니다. 언니들이 한 분도 아프지 않고, 이주여성들이 모두 체류자격과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