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훈(산부인과 의사,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안녕하세요. 먼저 제 소개를 간단히 드리자면 산부인과 의사이고 제가 속한 단체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center for Sexual rigHts And Reproductive justicE)를 통해 두레방과 연결되어 2019년 겨울부터 올해까지 두레방 상담소와 쉼터에서 총 4차례의 성교육을 진행해 왔습니다. 저는 활동을 하면서 진료실 밖에서 성교육을 할 기회가 종종 있는데요, 진료할 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교육 현장에서 가장 힘이 빠질 때에는 저 혼자 말한다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제 딴에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상대편에서는 그저 예의상 듣는 척(?)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감지하는 순간, 어찌어찌 그 순간의 고비는 넘어가는데 끝나고서는 맥이 탁 풀려버리는 거죠. 사실 이런 실패의 순간들을 경험하다 보면 저만의 노하우랄까 하는 것이 쌓이기도 하는데, 반면 계속해서 실패만 겪게 되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거든요. 이런 제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른 성교육 현장과는 매우 달랐던 두레방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두레방에서의 교육은 통역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 다른 교육과의 큰 차이였습니다. 고맙게도 통역사 역할을 평소 참여자들과 친분이 있는 두레방 활동가분들이 맡아주었지요. 제가 한국어로 말하면 활동가분들이 타갈로그어나 영어로 순차통역하는 방식이었는데, 한 번은 두 언어를 한 공간에서 동시에 통역해야하는 상황이 생겨 세 가지 언어가 정신없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순차통역을 하다보면 평소 보다 두 배 정도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는데, 그 긴 시간을 활동가들과 참여자들 모두 집중해서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마어마했던 경험이었어요. 다른 교육 현장과는 달리 서로 눈치 보면서 쭈뼛쭈뼛하지 않고 평소 자신이 불편했던 증상들, 병원에서 질문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던 의견들이 쏟아질 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기면 그야말로 신이 나죠. 통역을 해주신 두레방 활동가분들과의 멋진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한바탕 가지고 나면 평소 진료실에서 환자들이 잘 내비치지 않아서 몰랐던 고민과 속내를 좀 더 이해할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교육에 참여하신 분들이 매번 다르긴 했지만 두레방은 다른 어떤 교육 현장보다 이처럼 집중력과 참여도가 대단했는데요. 그 이유를 제가 조심스레 넘겨짚자면 아마도 현재 참여자들의 상황 때문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국에 이주, 그것도 대부분 미등록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병원을 이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죠. 지금 한국의 의료체계는 아픈 사람, 필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의료의 본래 목적을 한참 벗어나서, 건강보험이 있고 돈이 있고 말도 통해야 병원에 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서울과 수도권은 당장 아플 때 찾아갈 수 있는 산부인과 병원이 가까이에 있지만, 어떤 지역에선 그나마 갈 수 있는 병원도 매우 한정되어 있지요. 활동가가 동행하여 병원을 가는 경우라도 의료인이 성매매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거나 짐작하게 되면 대우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필요한 설명은 생략하고 불필요한 검사나 치료가 많아지는 식으로요. 이런 상황에서 현재 나의 몸에 대한 상태와 관련 의료 정보를 정확히 알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에 중요한 시기를 놓쳐 건강을 해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성교육은 자기돌봄(self-care)이 가능한 의료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몸에 어떤 이상이 느껴질 때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병원에서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떤 검사와 치료는 불필요한 것인지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역량 강화는 일방적인 교육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정보 역시 그 내용이 무엇을 포함하고 어떻게 전달되는지가 중요하고, 건강보험이 없는 경우처럼 상황에 따라 정보의 쓸모도 달라지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상황을 알지 못하면 기껏 설명해놓고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두레방에서의 경험은 뻔한 성교육, 정답이 있는 의료 지식 전달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실제로 나의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면서 필요할 때 병원을 이용할 수 있을까를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고 다른 언어를 가진 어떤 낯선 선주민 의사가 교육장에서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실제 삶과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는 당장 필요할 때 타인의 도움 없이 병원에 가서 의사소통의 장벽 없이 상담하는 게 마땅한데,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못한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렇게 일회성 교육으로 메울 수 있는 자리는 너무 작아서 때론 보잘 것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료실 밖에서의 상황을 만날 수 있는 이 흔치 않은 경험이 한편으로 저에게는 큰 배움의 기회가 되고 활동을 더 넓혀나갈 수 있도록 자극하죠. 두레방 활동가들이 내담자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상담과 케어로 신뢰를 쌓듯이 성교육을 하는 사람도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내담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워야 공감할 수 있고 실제 상황에서 유용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두레방에서 있었던 네 차례의 성교육은 이후 셰어(SHARE)의 활동으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강의 형식을 벗어나 조금 더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성교육 프로그램을 두레방 활동가들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는 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공감하신다면 아낌없는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