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방 상담소 활동가 박수미
2022년 3월 20일(일) 오후 3시, 문혜림 선생님의 추도예배가 한빛교회에서 열렸다. 두레방이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문혜림 선생님도 언제나 그 모습으로 두레방을 든든하게 지켜주실 거라고 믿어서였을까? 추도예배 장소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돌아가시면서까지 ‘두레방’을 거쳐 갔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드신 분.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니, 더욱 그분이 그립고, 보고 싶어졌다.
억압과 착취가 난무했던 한국 역사 속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처음 외쳤던 위인, 문혜림 선생님은 과연 어떤 삶을 사셨을까?
미국인인 문혜림 선생님을 도와 두레방을 함께 세웠던 유복님 활동가가 가장 먼저 마이크 앞에 섰다. 담담하게 두레방이 걸어간 길을 읽어 내려간다. 마치 문혜림 원장님이 곧 두레방이었다고 읊조리는 것 같다. 그녀가 했던 일은 그대로 두레방의 발자취가 되어 두레방의 역사가 되었다. 한국 역사 속에서 존재감 없이 고통과 착취만 당하고 살던 기지촌 여성들을 처음으로 알아봐주고 먼저 다가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주고 감싸준 사람. 억압받고 멸시당하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유쾌하고 긍정적인 리더쉽으로 다가가 진정한 언니와 자매가 되어준 문혜림 선생님이야말로 ‘여성 예수’로 살아가신 분이 아닐까?
한국 기독교 장로회 여신도회 전국 연합회 총무로 일했던 정보영 목사님이 전하는 여러 일화 속에서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유신반대 투쟁으로 투옥된 남편 대신 가정을 혼자 힘으로 책임져야 했던 문혜림 선생님은 그 순간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남편 자신이 원하던 일을 위해 그렇게 된 것이니, 나는 괜찮다”고 말씀하셨다던 대목에서 역시 선생님답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의 일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이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견뎌내고 인내할 힘을 지닌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니 그 당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 쓰고 기지촌 한 복판에 두레방까지 세우실 생각을 하실 수 있었으리라.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문혜림 선생님의 두레방 활동사진을 기억한다. 언니들과 뒤섞여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그분은 단연 눈에 띈다. 하지만, 그분을 통해 우리의 시선이 곧 다른 곳으로 이동된다. 덩실덩실 함께 춤을 추는 기지촌 여성들에게로. 이들도 이렇게 춤추고, 웃고,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보통의 추도예배와는 사뭇 달랐다. 고인의 찬란했던 삶 덕분에 그분의 죽음을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문혜림 선생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풍성했던 추도예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문혜림 선생님의 죽음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분을 다시 살아나게 했고, 그분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문혜림 선생님은 두레방을 세운 설립자만이 아니다. 두레방은 한국의 반성매매 운동 단체의 모체이다. 따라서 두레방과 문혜림 선생님은 지금의 성매매 단체들이 존경하고 우러르는 단체이자 역사적인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동안 두레방은 문혜림 선생님을 닮아,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취약한 여성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 나섰다. 문혜림 선생님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지만, 두레방과 두레방 활동에 동참하는 우리는 그분을 추모하며 이러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혜림 선생님이 “두레방을 통해 바라고 계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질문해본다. 아마도 기지촌 여성들도, 자신처럼 자유롭고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당연하고도 소박한 꿈이,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무리하고 이상적인 것이라고 거부당할 때가 많다. 오늘 이렇게 문혜림 선생님께서 우리를 부른 것은, 두레방이 하고 있는 이 일에 다시 한번 힘을 모아보기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문혜림 선생님의 추도예배는 다시 한번 그녀가 헌신하여 세운 두레방에 대해 상기시켰다. 문혜림 선생님은 그렇게 두레방을 위해 늘 함께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