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오늘은 언니들의 주거 이전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닌 터라 정신이 없다. 영구임대주택 신청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주민센터로 향하는 길… 몸이 불편한 언니들을 위해 두레방 차와 경태 선생님의 차까지 총 2대가 움직이기로 했다. 서류 취합은 경태 선생님의 도움으로 미리 차곡차곡 준비해 두었다. 이 과정 중에 보증금 200만 원이 없어 포기하는 언니들이 있었다. 좋은 기회인데…일단 접수라도 해보자고, 돈은 나중에 같이 모아보자고 했건만 거절하셨다. “미안해서 싫다” 시며… 결국, 다섯 분의 언니들을 우선 모시고 신청서류를 모아 최종 접수했다.
하늘이 계속 흐리다….
경희 언니에게 얼마 전 이야기해 주었던 영화 이야기 좀 다시 해달라고 졸랐다. <눈물의 웨딩드레스(Wedding Dress In Tears)>, 1973년도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로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작품인데 먼저, 영화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영은 고등학교 삼학년 학생이다. 어머니를 잃고 낙담에 빠져 있던 그는 경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영의 대학에서의 계속적인 학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들은 서로의 이해를 통하여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 후 경희는 용의 사랑과 장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어 그의 곁을 떠난다. 그때부터 2년간을 용은 그녀를 찾기위해 모든 힘을 쏟아 헤메인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고, 젊은 연인들을 위한 행복의 종소리가 들려온다.(출처: https://movie.baragi.net)]
그럼, 이제 두 번째 버전의 이야기! 두레방 우리 경희 언니가 생생히 들려주는 ‘진짜’ <눈물의 웨딩드레스>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자.
“배경은 *인천 학익동….몸 파는 여성이었던 경희와 고시생 영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 경희는 본인이 번 돈으로 영의 생활비와 학비를 대주며 뒷바라지를 하게 되는데, 이후 영이가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자 경희는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해 조용히 곁을 떠났어. 그리고 영은 오랜 시간 경희를 찾아다녔지. 결국 경희가 있는 *직업보도소로 영이가 찾아왔어.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직업보도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에서 꺼내주려고 찾아온 거야. 하지만 규율 상 가족이 아니면 그녀를 만날 수조차 없자, 영은 ‘알겠다’며 사라진 뒤, 6개월 후에 그녀와 자신의 혼인신고서를 만들어 다시 찾아왔어. 그리고, 경희를 그곳에서 꺼내준 후 영은 경희를 떠나….그 후, 과거의 생활을 접고 갈 곳이 없던 경희는 다시 직업보도소로 들어와 그 안에서 잡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지…”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직업보도소 원장의 아들이 한 여성, 경희의 ‘진짜’ 이야기를 글로 썼고 그 글이 영화화 된 것이 바로 <눈물의 웨딩드레스>인 것. 영화 안에서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결론을 맺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학익동은 타 지역에 비해 나이가 많고 힘들게 사는 여성들이 많았어. 그 옆 *옐로우하우스엔 좀 더 젊은 여성들이 많았지.”
“영화 안에서 종소리가 나는 장면이 있어. 내가 있던 *직업보도소에서도 항상 종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바로 옆 천주교에서 나는 종소리였었지”
요즘에도 경희 언니는, 언니가 잠시 머물렀던 그 직업보도소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시곤 한다. 우리 언니들도 저마다의 ‘눈물의 웨딩드레스’ 스토리를 지니고 있을까? 슬픈 사랑의 이야기?
기지촌, 성매매집결지, 그 안에서 삶을 이어온 이들의 목소리들을 또렷이 기억하는 경희 언니의 이야기는 곧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리라……
*학익동 | 인천 남구 학익동에 위치한 인천의 대표적 성매매집결지로 속어로 ‘끽동’이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창제도는 1947년 미 군정청에 의해 폐지됐지만, 미군 주둔지 등을 중심으로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고, 끽동(학익동)은 이때부터 음성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 28개 업소가 1차 폐쇄에 들어가면서 급격히 쇠락되었다. (경인일보 2007.06.09. 성매매집결지 ‘끽동’ 역사속으로…불 꺼진 집장촌-슬픈 역사의 거울…”굿바이” ) |
*옐로하우스 | ‘옐로하우스’란 이름은 1970년대 미군 부대에서 노란색 페인트를 얻어다가 외벽을 칠한 데서 붙여졌다. 2000년대 성매매업소가 90여 곳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지만, 성매매방지특별법 시행 뒤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현재 7개 업소와 종사자 30여 명이 남아있다. (한겨례 2019.02.15. 인천 ‘옐로하우스’ 종사자들 “이주보상비 달라” 1인 시위) |
*직업보도소 | 1961년 11월 9일에 새로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윤락여성 선도 지역을 설정하고 일정한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어 성매매 여성들로 하여금 정신교도와 직업보도, 보건관리, 가내수공예, 낙농 등을 경영하게 하여 자립 갱생하도록 하는 시책….그러나 이 법에 의거하여 직업보도시설을 운영하고 부녀상담사업을 실시하였으나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인 방지대책에 불과하였다. 법적 근거도 없이 성매매여성들을 강제로 시설에 입소시키고 의무적으로 직업훈련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심각한 인권문제를 발생시켰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