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J) 나는 현재 한국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석사과정 학위 요건으로 나는 6주 동안 두레방에서 현장실습을 하였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하는 실습보다 일정이 길다는 주변의 지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사실상 충분히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참여할 것을 요청받은 활동들(여성들과 상담하기, 각종 교실 프로그램, 재판 방청, 연대단체들과의 회의, 발의된 조례에 관한 토론회)의 중요성에 대해 썼다. 하지만 두레방의 후원자들과 뉴스레터 구독자들은 이미 이러
우연히 사귀게 된 두 명의 친구 한국에 온 지 7개월이 흘렀다. 새로운 여성들에게 자신의 일을 이해하는 데는 한 달 혹은 두 달의 시간이 주어진다. 클럽 주인이 너그럽다면 세 달이 주어질 수도 있다. 빨리 익혀야 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술을 팔아 가능하면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클럽 주인이 바로 다음 날 나를 다른 클럽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다. 내가 지금쯤이면 일에 잘 적응했을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겠지만 7개월 동안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내가 물 밖에 나온 물고기마냥 느껴진다.
하주희 변호사 지난 해 6. 25. 평화를 열망하며, 과거 우리에게 있었던 진실을 직시하고자 122명의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4가합544994). 기지촌 위안부 관련한 소송을 제기한 후 4차례의 변론기일이 열렸으며, 매 기일마다 원고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셔서 이 사건의 무게를 법원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30여 명의 변호사들이 원고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기지촌을 적극적으로 형성, 관리 하였고, 기지촌 미군 위안부들의 인권을 침해하
조은수 (두레방 쉼터) 서쪽으로 과테말라와 북동쪽으로는 온두라스와 접경해 있는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는 멀게 느껴지는 나라이고 한국 선교사 파송지역으로 겨우 들어봄직한 나라이다. 파나마와 암스테르담을 거쳐 16-18 시간의 긴 비행 후에 24세의 엘 살바도르인 여성 아달리아는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 오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달리아는 한국을 가게 되리라고는 꿈꾸지도 않았다. 그녀는 쌍둥이 자매,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넉넉하지는 않지만 카톨릭 가정으로 단란하게 살고 있었고, 대학에서 공부하며 틈틈이
김태정 (두레방 상담실장) 소요산 성병관리소(몽키하우스) 이곳은 1970년대 초부터 진료를 했던 성병관리소로 총 이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여기에서 진료를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여성들이었다. 이 성병관리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보산동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여기에는 캠프 케이시, 호비 등의 여러 미군부대들이 주둔해 있고 그 앞으로는 클럽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휴전과 함께 동두천에 미군부대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미군들을 위한 윤락시설 및 상점들이 생겨나기
백은정 (두레방 활동가) 두레방에서는 예전부터 미술치료와 같은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지속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클럽에서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생활패턴이 몸에 익은 언니들이 오후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공예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언니들의 효율적인 참여를 위하여 2주에 1회 진행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수업을 진행하였을 때 언니들이 수업을 진행해주신
김태정 (두레방 상담실장) 두레방이 의정부에 터를 잡고 활동한 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미군기지도 변하고 기지촌도 변했다. 한국전쟁이후 한국 땅 한켠에 자리잡은 미군기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그 중에 우리 두레방 멤버인 한국 언니들도 있었다. 휴전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했으나 기지촌은 한국여성에서 외국인여성으로 성착취 대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북쪽(의정부, 동두천)의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지는 오래 전부터였다. 특히
두레방은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조직하고 격려하고 임파워링하는 일을 활동의 가장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뉴스레터를 발간하기로 했을 때 이 공간이 두레방의 활동가들에게도 또 우리 언니들에게도 살아가며 투쟁하는 얘기를 쓸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마침 두레방 활동에 열심인 M으로부터 흔쾌한 승낙을 받았고 그렇게 해서 M의 한국살이 연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이 다 그렇듯이 M의 한국살이도 희노애락의 연속입니다. 희망과 꿈을 놓지 않고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M
채고운 (두레방 활동가)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첫 공판이 12월 19일 서울지방법원 560호 오후2시에 열렸다. 우리가 들어선 재판장은 작고도 작았다. 한 목소리를 내기위해 발걸음 한 이들을 수용하지 못한 채 밖에서 기다리거나 통로에 서거나 해야만 했다. 정부 측은 그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공판 당일 오전에야 답변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출석한 정부 측 변호인은 국가 배상이 성립되려면 할머니 122명 개개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