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방쉼터 공예프로그램 강사 이윤정 저는 다양한 연유로 한국에 사는 아시아계 이주민 친구들을 더러 사귀는 사람입니다. 한 미술 단체에서 일하다가 그만두는 끝자락에 우리나라로 온 아시아계 노동자들, 또는 결혼을 통해 정착하신 분들과 그림 그리는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안성에서 살고 있던 저는, 두레방 쉼터와 인연이 닿아 그곳의 친구들을 만나 종종 미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쉼터 친구들이 저희 작업실에 놀러왔습니다. 주로 이주민들이 모이는 곳으로 제가 가서 미술활동을
2014년 4월 16일 제주도행 여객선이 침몰되었고 승선한 고등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당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2021년 4월,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7주기가 되는 해 이다. 사고에 대한 진상이 밝혀진 것 없이 7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다는 것이 놀라웠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여러 활동 중 노란 리본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노란색 리본에 대한의미를 알고 깜짝 놀랐다. 노란 리본은 무사귀환을 바라는 상징으로, 세월호 사고 당시 배에 갇힌 모든 사람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였고 모두
지난 2021년 5월 17일(월) 오전 11시, 아침부터 추적추적 뿌린 비는 점심 무렵에도 그칠 줄 몰랐습니다. 기지촌 ‘미군위안부’ 생존자들과 두레방을 포함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경기여성연대, 기지촌문제 연구자들이 모여 대법원 정문 앞에서 우산을 펴들고 기자회견을 열었었습니다. “국가배상청구소송의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현수막과 손 팻말은 약간의 물기를 머금어 무거원진 모습이지만, 오히려 “지난한 소송에 마침표를 찍어 달라”는 외침과 함께 시선을 압도했습니다. “인신매매로 기지촌에 팔려 온 15세 때
나는 내 건강에 대해, 특히 내가 감염되었거나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놀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산부인과에 간 것은 두레방과 함께 갔던 것이 전부다. 병원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혼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의사에게 질문하기가 부끄러웠고, 그가 내게 질문할까봐 걱정되었다. 4월에 두레방에서 열린 성교육 수업에 참여하였다. 그런 수업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으나, 내 신체와 성생활에 대한 몇 가지 팁을 배우기 위해 함께 하기로 결
두레방쉼터 활동가 슬슬 2021년 4월 두레방에 첫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평범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오래전부터 남을 돕고 봉사하는 것에 보람 있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선한 일을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두 달 동안 두레방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은 이쪽 분야에 관심은 많았지만 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 코로나 여파로 아직 많은 경험을 하지
두레방상담소 원장 김은진 두레방 활동가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4/9~6/4까지 매주 금·토 총 34강의 교육을 받는 100시간의 여정에 발을 들여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긴 시간의 교육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오랜만에 머리로,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나에게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상담소 원장이기 전에 한 사람의 상담가
*활동가 조이스(두레방 상담소) 2020년 4월 목요일 밤. 동두천 기지촌 클럽 거리가 텅 비어있는 상태로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클럽 몇 군데 빼고, 거리의 클럽, 바(bar), 음식점, 가게들이 모두 문이 닫혀 있었기에 밤이면 늘 밝은 간판과 조명에 비추어져 있는 클럽 거리는 완전히 어두웠다. 길고양이들 빼고 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주한미군의 락다운(외출•외박 통제) 조치로 인해 미군들이 클럽을 다닐 수 없었다. 특히 평택 캠프 험프리스와 동두천 캠프 케이시의 기지촌 업소들은 2월말과 3월에 문을
*활동가 민(두레방 상담소) 작년 이맘때쯤엔 내가 활동가로서 일하게 될지 상상도 못했다. 사실, 활동가는 어떤 분야의 전문적이고 특별한 사람들로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래서 두레방에서의 활동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했다. 2월쯤 두레방활동가 모집공고를 접한 뒤, 홈페이지를 둘러보면서 두레방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당시 기지촌여성이나 군사주의 이슈를 잘 알지 못했지만, 자석이 끌어당기듯 알 수 없는 이끌림이 나를 잡아당겼다. 코로나사태로 면접이 계속 연기되었고, 오랜 기다림
*김은진 원장(두레방 상담소) K 언니 사망신고를 하고 오는 날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둘 눈송이가 날렸습니다. 그날은 S 언니가 퇴원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1986년 설립 당시부터 두레방과 함께한 언니들이 두레방과 같이 나이 드시며, 눈송이 같이 스러집니다. 2014년 6월 25일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했던 122명의 피해여성들 중 8명이 사망, 현재 114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발 끈을 조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으로 힘겹고 어려웠던 2020년이
두레방에는 선주민 활동가와 이주민 활동가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2020년, 태국인 활동가 ‘펀’ 님께서 지난 10월 한국여성진흥원에서 실시한 「성매매방지 상담원 양성교육(3기)」에 참여했는데, 짤막한 소감과 함께 묵직한 물음을 던져주었습니다. *활동가 펀(두레방 쉼터) 두레방 쉼터에서 2년 여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2020년 10월 훈련 세션에 참석할 기회를 얻어 「성매매방지 상담원 양성교육」을 받았습니다. 100 시간 동안 줌(ZOOM) 프로그램으로 교육받았습니다. 이 교육을 통해서 한국의